그리스도인 자유를 찾아서(In search of Christian freedom) 제1장~제3장 한국어
글쓴이: 류비 / 시간: 금, 08/05/2016 - 20:44
제목: 그리스도인 자유를 찾아서(In search of Christian freedom)
저자: 레이몬드 프랜즈(Raymond Franz) - 과거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
발행: Commentary Press 1991년 발행.
(초판: 1991년 인쇄. 재판: 1999년 인쇄. 3판: 2002년 인쇄.)
번역: 다리우스, 교정: 다리우스, 크레용
* 별다른 표시가 없는 한, 본 책에 표시된 모든 성구는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서 발행한 [신세계역 성경]에서 인용하였습니다.
단, 영문판에서 신세계역 이외의 영어 역본이 사용되었을 경우에는,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 한해서 다른 한국어 역본을 인용하고 그것을 표시하였습니다.
*대괄호 [―]는 원문에 있는 각주. 혹은 한국어 역자 다리우스님이 첨가한 각주입니다.
*일부 소괄호 (―)는 뜻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크레용이 첨가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자유를 찾아서]
제 1장
그리스도인 자유를 추구함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키셔서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믿음뿐입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잘 달려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여러분을 막아 진리를 따르지 못하게 합니까?" ― 갈라디아서 5:1,6,7, 쉬운성경. (원문에서는 예루살렘 성서에서 인용.)
자유는, 믿음과 사랑 그리고 진리와 더불어 참 그리스도교의 핵심적 부분입니다. 자유가 보장되면, 믿음, 사랑 그리고 진리가 발전합니다. 자유가 제한되거나 부족해지면, 이러한 것들은 필연적으로 위축됩니다. ― 고린도 둘째 3:17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바로 우리가 자신의 믿음과 사랑을 진정으로 온전히 표현하게 하기 위함이며, 하나님이 아닌, 인간들이 우리에게 가하는 억압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진리를 희생시키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이 우리를 규제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거짓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수십년 동안,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가졌던 종교로 부터 이탈하였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동일한 기간에 또 다른 수십만명이 동일한 종교를 받아들였습니다. 이 덕분에 이 종교는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특정한 사람들이 이 종교를 이탈하거나 받아들이는 것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질문은 탈증인들이 왜 떠나 가고 있는가, 무엇이 그들을 떠나가게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자신의 믿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그리스도인 자유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습니까? 그들은 그곳에 남아서는 이것들을 성취할 수 없었습니까? 그들의 이탈은 정당한 것입니까?
탈증인뿐 아니라, 증인을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의심의 여지없이, 이들중 수많은 사람들은 이전에 종교에 무관심했고, 영성이 없었으며, 기본적으로 물질적 견해를 가졌을 것입니다. 증인이 되어가는 동안, 자신들의 삶의 영역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적어도 그들중 상당수는 성적 부도덕, 알콜 중독, 마약 중독, 폭력 또는 부정직, 심지어 범죄 생활로부터 벗어나는데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분명 자신의 삶이 향상되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나 이런 도움의 성과가 그들만의 업적은 아니라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대부분의 종교들과 교회 조직들도 역사를 통해 수 많은 실례들을 산출하고 있으며 그들은 간증 등을 통해 회개의 결과로 자신들의 삶이 획기적으로 변화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워치타워 조직의 도움으로 과거의 습관과 중독을 극복한 사람들과 성과들은 알콜 중독 치료 센타, 약물 중독 치료 센타등의 일부 사회단체들이 하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증인이 된 대다수의 사람들은 과거에 이러한 문제들에 깊히 빠져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이 남습니다: 그들이 얻는 외적 유익이 무엇이든간에, 이것을 얻기 위해 어떤 댓가를 치루어야 합니까? 그들이 증인 조직에 연합하기 위하여 진리와 믿음과 사랑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현할 자유가 박탈되지는 않습니까? 이러한 것을 유지하기 위하여 인간 통치체의 강요와 억압은 없습니까? 이러한 경우가 있다면, 증인들이 얻는 발전적 상황이 얼마나 진정한 것입니까? 외적 유익이 참 그리스도인의 증거입니까?
이러한 동일한 질문은 어떤 종교를 받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적용할 수 있습니다. 여기 제시된 내용들이 어떠한 종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든지 가치있는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의 쟁점은 특정 종교에 관련된 사람들에 대한 문제보다 더 중대한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의 핵심입니다.
어떤 면에서 차이점이 있는가
수 세기전에, 종교 개혁 당시, 많은 사람들은 양심의 억압을 느끼고 그들의 삶과 믿음에 대한 종교 지도자들의 지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중 한사람은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자유로운 주인이며,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리고 나서 뒤이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에 대하여 순종적인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종속되어 있습니다." [ 마틴 루터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중에서] [...] 표시는 역자의 각주임.
이 말은 모순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말은 기본적으로 고린도 첫째 9:19 에 있는 사도 바울의 말을 바꾸어서 말한 것입니다.
"나는 비록 모든 사람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되었습니다."
높은 지위나 권위에 굴복하여 복종하는 것과, 자신의 마음에서 자발적이고 자유롭게 일어나 순종하고 봉사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순종과 봉사는 타인의 주장과 요구에 양보한 결과가 아니라, 타인의 필요에 대한 인식의 결과이여야 합니다. 그래야 선한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을 하나님이 임명하신 머리와 주인으로 인정하였습니다. 1인 교주이든 그룹으로된 통치체이든, 다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았습니다. 일부 이러한 권력을 획득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온전히 종으로 삼으려고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와 결합하여 가지고 있는 자유를 염탐하고자 몰래 들어온 자들입니다. (마치 노예를 쇠사슬에 묶듯이 자기들의 규칙을 가지고 우리 모두를 묶어 놓을 생각만 하는 자들입니다. - 현대어 성경)그들에게 우리는 굴복하여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한시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좋은 소식의 진리가 여러분과 계속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 [갈라디아 2:4,5]
사도 바울은 종교적 지배를 통하여 그리스도인 자유를 상실하는 것을 가볍게 보지 않았습니다. 제 1장 도입부에서 인용한 [갈라디아 5장]을 그가 기록할 때, 사람들을 거짓 복음 즉 가짜 좋은 소식으로 미혹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 계약을 의무적인 것으로 다시 부과하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면으로 이것은 위험한 함정입니까? 어쨌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강요되었던 그 법은 바로 여호와께서 직접 모세를 통하여 주신 율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율법을 다시 부과하는 것이 "종살이의 멍에를 다시 [매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까?
이러한 위험성중 일부는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율법을 해석하는 중재자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여기고 허용하게 됩니다. 그들은 율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부여받고, 통치체를 구성하고, 종교적 사법 모임을 통해 원칙을 적용합니다. 그리고 율법의 집행자로써 신성하게 여겨지게 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신자들 위에 인간 제사장 직분을 재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만이 한 분뿐인 대 제사장이며 중보이십니다. [디모데 첫째 2:5; 히브리 4:14-16; 7:11-18] 그런데 왜 일부 사람들은 초기 1세기에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다시 시작하려 하였습니까? 명확한 이유는,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력과 권위를 행사하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동료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권력을 추구하였으며 그것을 얻기 위한 방법중 하나로 그리스도인들과 그들의 정당한 머리이신 그리스도 사이에 끼어들기로 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0:29,30 에 기록된 사도 바울이 한 예언의 성취입니다:
"내가 떠난 후에 압제적인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부드럽게 대하지 않을 것임을 나는 압니다. 또한 여러분 자신들 가운데서 사람들이 일어나 제자들을 끌어 내어 자기들을 따르게 하려고 뒤틀어진 것을 말할 것입니다."
[ "압제적인"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단어 '바리스(barys)" 는 "무거운"을 뜻한다. 마태 23:4 에서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다.]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었으며, 논리적으로 들렸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듣고 확신하였으며, 이것을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였음을 알려줍니다. 율법의 준수를 옹호하는 자들은, 하느님은 의로움과 거록함을 요구하신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참입니다. 율법을 부과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이 단순히 의로움을 유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쇄골을 드러내듯이, 그들은 할례를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거의 2천년 전, 아브라함 시대에 하느님께서 직접 명하신 것이었습니다. 어째든, 이런 주장이 한번 받아들여지자, 그들은 이에 대하여 율법적 명령들을 첨가하였습니다.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기위한, 그리고 회중을 깨끗하게 관리하기 위한 필요성을 근거로 제시하였습니다. [사도 15:5,10]
여기에 가장 위험한 함정이 놓여 있습니다. 율법의 준수를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변질시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근거를 잘못 해석한 것이며, 그리스도인 봉사의 촛점에 부합하지 못하고 벗어난 것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자신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임명받아 전파한 좋은 소식에 대한 심각한 부정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갈라디아 1:1, 8-12] 사건의 심각성을 조목조목 지적하면서, 그는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여러분이 누구이든 율법에 의하여 의롭다고 선언받으려 하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집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그분의 과분한 친절에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우리 자신은 바라는 바 믿음의 결과로서의 의를 영으로 말미암아 간절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에 관하여는, 할례나 무할례는 아무런 가치가 없고 사랑을 통하여 작용하는 믿음이 가치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5:4-6. 원문에서는 NIV]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영감받은 필자[바울]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핵심을, " 사랑을 통하여 작용하는 믿음"이라고 요약하였습니다. 그것은 법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니며, 그렇게 함으로써 타인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이 동반되어서도 안됩니다. 그리고 어떤 정책이나 규정을 위반한 것에 대해 사법 모임에서 질책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됩니다. -- 오히려 믿음과 사랑이 그리스도인 남녀를 움직이는 동기이어야 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적극적인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범죄에 대한 억제력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선한 행실을 하게 하는 가장 위대한 자극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참된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동기에서 나오는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마도 가정 생활을 예로 들어본다면, 율법 아래 있는 것과 은혜 즉 과분하신 친절 아래 있는 것의 극명한 차이를 예시해 줄 것입니다. -- 이러한 차이점이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검토해 봅시다.
한 집에 가장인 남편을 고려해 봅시다. 그는 아버지이자 가정의 주수입원입니다. 그가 규칙(율법) 목록을 통해 머리 직분을 수행하고자 결정했다면, 아내가 준수해야 할 특별한 원칙들을 정할 것입니다. 가족들이 정확히 지켜야할 율법들을 세우기 위해, 아내가 돌봐야 할 모든 살림살이에 대해 방법과 날짜와 시간을 정해줄 것입니다. 그것에 따라 가족을 돌볼 책임들 -- 청소, 쇼핑, 식사 준비, 세탁, 자녀 교육--을 수행해야 합니다. 이런 남편은 모든 것이 계획표에 따라 움직이는,매우 질서 정연한 가정을 만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매우 불행할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정한 율법과 권위에 따라 잘 돌아가는 가정을 보고 만족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랑의 동기로 행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반대로, 사랑과 친절의 힘을 믿는 남편이 있습니다. 그의 생각은 남성우월주의라는 잘못된 사상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아내를 존중하고 신뢰합니다. 아내의 지성과 능력을 인정해줌으로써 개인적 독창성을 가지고 가정을 꾸며나가도록 할 것입니다. 또한 남편은 아내가 자신만큼이나 예민하게 가정과 가족들에게 관심을 기울릴 것을 믿어줍니다. 그는 이러한 지식에 따라 그녀를 대하고, 그 결과 질서있고, 잘 관리되는 가정을 기뻐할 것입니다. 이런 가정은 그 어떤 가정보다도 편안하고 행복할 환경이 조성될 것입니다. 남편은 작위적인 권위를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의사소통과 토론을 하고,함께 결론과 결정을 내림으로써 이런 가정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가 깔끔하고 깨끗한 집안, 잘 준비된 식사, 잘 정리된 옷들을 볼때, 또는 자신의 자녀들이 자신에게 진정한 존경심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될때, 그는 이 모든 것의 결과가 원칙을 잘 지키는 것 이상의 무엇인가가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는 진정으로 만족할 것이며 이 모든 것이 남편과 결혼 생활 그리고 가족에 대한 아내의 사랑으로 부터 나온 것임을 알고 기뻐할 것입니다.
이 두가지 경우의 외형적인 결과는 어떤 면에서 동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적 결과는 엄청나게 다릅니다. 핵심은 동기와 영의 차이점에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 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과분하신 친절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차이가 결과적으로 어떤 영향을 가져오는가를 보여줍니다.
분명히 이것은 하느님의 지혜의 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원칙"인 사랑과 믿음이 생각과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감명을 받고 삶의 모든 부면에 영향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율법과 원칙이 이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율법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나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것을 보여줄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느님만 이것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 성원으로써 오래 있으면 있을수록, 이런 쟁점들이 더욱 더 나를 압박하였습니다. 나는 우리의 통치체 회의에서 비정상적으로 많은 시간들을 소비해서 사람들의 사생활에 대한 규제들을 만드는데 몰두함을 발견하였습니다. 나는 하나의 원칙을 또 다른 의문을 낳고, 더 많은 원칙들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원칙들로 타인의 의로움을 판단하게 됩니다. 그들은 이러한 원칙들을 잘 지키기만 하면, 하느님과 그리스도 앞에 합당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소수의 통치체 성원들이 진정으로 하느님으로 부터 그렇게 하도록 권위를 부여 받았습니까? 우리가 섬기도록 임명받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드디어 깨닫게 된 것은,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자유는 단순히 모세 율법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법을 지켜야 한다는 바로 그 관념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어떤 형태의 율법적 요소가 관련되어 있던지 간에, 바로 그 관념이 진정한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지키는 대신에,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의로움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방식은, 더 숭고한 방식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할때 그리스도인 자유가 가능하고, 의미있으며 진정으로 바람직한 것입니다.
율법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자신을 점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디모데 첫째 1:8-10] 그러나 사랑과 믿음이 더 숭고한 이유는, 그것들이 율법보다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온 의로운 영을 산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을, 우리는 더 크게 신뢰하게 되고, 더 큰 존경심과 경외심을 갖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어떤 나쁜 행동을 억제하는 이유가 "그것이 불법(율법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 이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그가 나쁜 행동을 억제하는 이유를 그것이 "이웃에 대한 사랑과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한 행동이기 때문" 이라고 말합니다. 첫번째 표현은 단순히 그 사람의 행동이 법에 대한 염려 때문임을 밝혀주지만, 반면 두번째는 우리에게 그 사람의 마음과 자발적인 감정을 볼 수 있게 해줍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언약을 위한 나라로 선택하셨을 때는, 사람들과 개인적 관계를 맺기위해 개별적으로 초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그들이 선하든, 악하든 그리고 무관심하든 집단적으로, 즉" 무리,덩어리 그리고 통으로" 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영적인 수준은 분명히 그때에나 후에나, 탁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율법이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필요한 역할을 성취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고대에 "가정 교사"가 정식 교사에게 아이들을 인도하는 것처럼, 메시야에게 이끄는 몽학 선생의 역활을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3:23-26] 그것은 분명이 자신들이 죄가 많으며, 자신의 죄로 부터 자유롭게할 힘이 없으며, 구속자가 필요함을 깨닫게 하였습니다. [갈라디아 3:19,21,22] 그것은 메시아를 통해서 성취될 실체들의 윤곽을 상징적으로 전형하는 "그림자" 입니다.[골로새 2:16,17] 율법이 없었다면, 이 나라가 1500년에 걸친 역사를 종결할 무렵, 하느님께서 그들 사이에 마련하신 대응물이 존재하더라도, 증명할 만한 근거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마련은 메시아를 적극적으로 증명해주기 위한 배경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의 경우에는 하느님께서 그들을 집단적으로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초대하십니다. 자신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개인적 관계를 맺으십니다. 육적인 강림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마음과 동기에 근거해서 초대하십니다. 정식 교사가 오셨기때문에 더 이상 그 분께 인도할 가정 교사가 필요치 않습니다. 그들은 "율법아래 있지 않고, 과분하신 친절 아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온 마음을 바치고, 그분의 영이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가 됩니다. [로마서 6:14-19] 영은 어떤 형태의 율법과 원칙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무한한 힘을 가지고 우리를 범죄로 부터 보호하고 선행을 하도록 움직입니다. 이 점을 놓치는 것은 좋은 소식의 모든 핵심을 놓치는 것입니다. 위대한 자유에 대한 인식을 나타내지 못 한다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완성하신 것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과분하신 친절 아래" 있는 것입니다."
삶의 다른 모든 부면, 특히 종교적인 면에서 " 자유를 얻는 댓가로 끈임없는 경계가 필요하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그리스도인 자유는 갑작스런 침략에 의한 폭력적인 정복에 의해서 상실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자신의 양심에 대한 권리를 포기함으로써 상실할 수 있습니다. 양심이란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자신이 참이라고 여기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때, 믿음은 마음으로 부터 우러나온 것이 되며,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개인적 지식에 근거한 것이 됩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이 자유를 상실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그는 타인의 확신과 추리에 근거한 간접적인 믿음에 이르게 됩니다. 어느 정도든 어떤 이유에서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의 권리를 희생하는 것은 우리가 믿음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제한하거나 금하는 것입니다. 이런 특성들을 자발적이고, 내적 동기로 인해 표현함으로써, 자유로운 풍토가 조성되는 것은 기뻐할 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둘째 3:17]
여호와의 증인 조직안에 그리스도인 자유의 풍토가 충만합니까? 외적 압력이 아니라 내적 동기의 결과로 자유롭게 사랑과 믿음을 표현하도록 격려합니까? 나는 증거들이 그렇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믿습니다. 내가 조직의 통치체 성원으로써 지내는 수년동안 그렇지 않음을 확신하였습니다. 모든 여호와의 증인 개개인들인 동일한 정도로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일부 사람들은 조직의 압력에 좀 더 합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개성이 침식당하는 것을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편협한 견해와 일방적인 사고방식에서 기인한 사상적 단절을 피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종종 자발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행동을 보여주며, 이것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명백한 사실은, 이것이 조직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조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는 일들입니다. 또한 나는 이것이 여호와의 증인들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어느 정도는 모두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며 이 영향은 필연적으로 해로운 것입니다. 세뇌된 사고 방식은 자유케 하는 진리가 아니라 왜곡된 진리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러한 왜곡으로 인해 증인들은 하느님의 아들의 추종자들이 [그리스도인 자유의 상실을] 수용해야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것은 증인들이 하느님의 특성을 온전히 표현하는 것을 방해합니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사랑과 믿음의 행동을 하는 것을 제한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성경적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일들에 순종하도록 강요당합니다. 한가지 또는 그 이상으로, 크던 작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유가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진리가 생략되거나 망각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셨으므로, 우리는 자유가운데 남아 있어야 합니다."
문제의 뿌리는, 한가지가 아니라 여러가지 입니다. 그러나 다음 장들이 가장 근본적인 원인들을 지적해 주리라 믿습니다.
그리스도인 자유를 찾아서
제 2장
하느님의 통로
"모든 것을 확인하고 훌륭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 ― 데살로니가 첫째 5:21
"사랑하는 여러분, 영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무턱대고 믿지 말고 그들이 주장하는 영이 하나님에게서 왔는지 시험해 보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이 세상에 많이 나타났습니다." ― 요한1서 4:1, 현대인의 성경.
(이 성구의 경우, 원문에서 「The Living Bible」을 인용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은「The Living Bible」의 한국어판입니다.)
저명한 18세기 영국의 학자이자, 민중적, 종교적 자유의 애호가로 알려진 종교 지도자 [벤자민 호들리 주교]는 놀랍게도 이러한 진술을 하였습니다:
"권위는 가장 위협적이고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진리의 적이며 이 세상에 항상 존재하는 논제이다. 모든 궤변 ―모든 색깔의 달변― 즉 이 세상의 뛰어난 논객들의 기교와 교활함이 발가벗겨진다면, 그들이 감추고자 하는 바로 그 진리를 깨닫는데 유익할 것이다; 그러므로 권위가 없어야만, 장벽이 없으리라."
[존 매클린톡과 제임스 스트롱 공편 「성서와 신학과 교회에 관한 문헌 백과사전」(Cyclopedia of Biblical, Theological, and Ecclesiastical Literature) 제1권. 553,554면에서 인용.]
만약 진정으로 권위가 진리의 오래된 적이라면, 그것은 또한 자유의 오래된 적입니다. 왜냐하면 진리는 자유의 주된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사람을 "자유케" 합니다.[요한 8:32] 만약 진리와의 전투에서, 모순이 발견되고 불리해 진다면, 최종적으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권위에 호소할 것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권위에 호소하는 것은 자체적으로 모순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외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책에서 아무리 많은 증거들을 제공하고, 아무리 많은 성경적 논증들을 제시하고, 아무리 많은 논리들을 증명한다 할지라도, 이 모든 것들은 배척되고 거부될 것입니다. 진리를 결정하고,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있는 특정한 사람들로 부터 지침이 내려 질 것입니다. 사실상, 대다수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이 모든 증거와 성경적 논증들은 그들이 들어 보기도 전에 배척될 것입니다. ― 왜냐하면 권위가 그들에게 배척하도록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권위 아래 있는 자들은 정보가 사실인지 거짓인지, 유익한지 해로운지 결정할 자유를 강탈당하고 있습니다.
또한 종교적 귄위를 가진 인간을 선과 악의 최종 결정권자로 섬기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진실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만약 권위가 자신을 위해 결정하고, 자신을 위해 말하고, 자신을 위해 생각하는 것을 허용하도록 선택했다면, 그때는 어떤 대안적 논증이나 새로운 증거도 그들이 공정하게 들을 것이라는 희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 권위가 없어야만, 장벽이 없[기 때문입니다.]" 권위는 대답할 필요가 없으며, 논박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 제시된 증거를 고려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죄하면 됩니다. 나의 믿음속에서, 이것은 근본적인 쟁점이었습니다. 이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고서는, 다른 어떤 것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이것이 증명되어야 하였습니다.
인간이 주장할 수 있는 가장 큰 권위는 자신이 하느님을 대변한다는 주장입니다.--특히 자신이 모든 인류 가운데 유일한 의사소통의 통로라는 주장은 그 어떤 주장보다도 강력한 권위입니다.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사실 엄청난 책임이 따를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진실로 그런 사명에 임명되었다면, 논리적으로 말해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최고의 인간성이 요구될 것입니다.
한번 잘 유추해 보십시오. 왕의 포고령을 전달하도록 보냄을 받은 한 종이 있습니다. 이 종이 자신을 강조하고, 겸손이 부족하다면, 이 사자(使者)는 마음대로 메세지를 첨가하고 변형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식을 듣는 모든 사라들에게 자신이 제시하는 것을 왕의 명령의 공식 문서로 받아들이도록 주장할 것입니다. 만약 백성들이 어떤 점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면, 그는 분개하고, 왕의 후광을 내세워 경외심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진술의 진실성에 대한 어떠한 의문도 덮어버리려고 할 것입니다.
반대로, 진실로 겸손한 사자는 양심적으로 왕의 원래 명령이 변형되지 않도록 조심할 것입니다. 그는 말에 대한 진실성의 증거가 자신에게 요구되더라도 분개하지 않을 것이며, 일부사람들이 제시한 소식이 과장이나 변형이 없이 주어진 그대로 전달되었는지 확인 과정을 거치더라도 비난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조사를 (단순히 종인) 자신에 대한 존경심의 부족이라고 함부로 매도하는 대신에, 그것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환영할 것입니다. 일부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그의 주인이자, 주권자의 뜻에 대한 관심과 깊은 존경심의 증거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워치타워 협회는 반복적으로 자신들의 소식이 생사를 결정하는 중요한 소식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조직은 그 소식이 최고 주권자이신 하느님께서 모든 인류를 위해 주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또한 그 소식에 대한 불순종의 결과로 영원한 멸망을 당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일부 다른 종교들도 동일한 입장을 취합니다.
분명히, 이런 중대한 주장을 검증하지 않는다는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주장의 중대함을 고려할때, 약간이 아니라 더 많이 그리고 더 주의 깊은 검증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에 대한 존경심만 있다면, 우리는 마음으로 부터 강력하게 이 소식이 첨가나 왜곡 없는 그분의 것인지 확인하고자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에 대한 존경심이 깊으면 깊을 수록, 검증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은 더 정성을 다할 것입니다.
내가 확신하는 워치 타워 조직의 가장 심각한 주장은, 자신들이 하느님과 의사소통을 하는 지상의 유일한 조직이라는 입장 표명입니다. 1954년 스코틀랜드 법정에서 재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직의 유일 구원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의 제명처분 결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조직의 공직자에 의한 가장 명백한 진술중 일부입니다. 이 재판은 월쉬 재판으로 알려졌으며,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으로써 스코틀랜드 회중의 주임 감독자였던 사람의 봉사의 직분의 상태에 촛점이 맞춰졌습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몇 년전에 나의 삼춘(1977년부터1992년까지 워치 타워 협회의 협회장)으로부터 그 재판에 대해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실제 재판 기록을 볼 수 있었으며, 모든 진술이 은폐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스코틀랜드 기록 보관원의 허락으로, 공식 재판 진술 기록을 복사해서 여기에 기재합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 당시 조직의 부협회장이었던 프레드릭 프랜즈가 첫번째 증인으로 나섭니다. 이 재판 기록은 다음의 정보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밑줄 친 부분은 내가 한 것입니다. ('Q' 는 질문을 의미하고, 'A'는 답변을 의미합니다.)
질문: 당신은 이 정기 출판물뿐만 아니라, 수시로 수 많은 신학적 팜플렛과 책자들을 준비하여 발행하였습니까?
답변: 그렇습니다.
질문: 다시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은 이러한 신학적 출판물들과 월 2회 정기 간행물을 사용해서 교리에 대한 진술을 토론하였습니까?
답변: 그렇습니다.
질문: 이러한 교리에 대한 진술은 협회 내부에서 권위있는 것으로 여기집니까?
답변: 그렇습니다.
질문: 협회에 남아 있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은 선택의 문제에 대하여 [교리를] 수용해야 합니까? 즉 그것은 필수적인 의무입니까?
답변: 그것은 필수적인 의무입니다.
이 진술에 따르면, 여호와의 증인에 남아있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택권이 없으며, 예외 없이 워치 타워 협회에서 출판물에 진술한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은 프레더릭 프랜즈가 대변인으로써 말한 것입니다. 수용은 "필수적 의무"입니다. 결과의 중요성을 그의 진술을 통해 알아봅시다:
질문: [의무에 대한 수용이] 지상에 존재할 새로운 인간 사회에 들어가는데 영향을 미칩니까?
답변: 그렇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 신세계 사회가 있을 것입니다. 이전 하늘과 이전 땅은 아마겟돈 전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질문: 이 새 땅의 인구는 오로지 여호와의 증인들로만 구성될 것입니까?
답변: 처음에는 여호와의 증인들만으로 구성될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남은자들은 이 아마겟돈 전쟁을 생존할 것이며, 다른 양의 큰무리 또한 그러할 것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남은자들은 계속해서 아마겟돈 전쟁 후에 이 땅에 일정기간 남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땅의 지상 행로를 충실하게 마쳐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른 양은, 계속해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한다면 지상에서 영원히 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무에 대한] 수용이 생명과 사망을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아마겟돈에서 생존할 사람들은 "오로지 여호와의 증인들만으로" 구성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만약 회중 성원이 조직의 특정 가르침에 대해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양심적으로 느끼고 거부한다면, 그 사람은 결과적으로 제명될 것입니까? 복귀하지 않고 제명된 사람들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은 무엇입니까? 다음 진술에서 그들의 입장을 하나 하나 따져봅시다.
질문: 그리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이러한 사도적 권위가 행사됩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질문: 이 문제에 대해 더 이상 부가적인 질문은 하지 않겠지만, 복귀를 희망하지 않는 자발적인 이탈자는 매우 심각한 범죄자로 간주합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만약 결코 회개하지 않거나 자신의 행로와 행동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제명처분은 제명당한 사람을 파멸로 이끌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계속해서 조직밖에 머문다면, 그에게는 신세계의 생명에 대한 희망은 없습니다. 또한 자신의 행실과 태도의 결과로 제명처분을 당한 후에도, 다시 복귀하지 않는다면, 성령을 거약한 죄로 불리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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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정부측 변호사는 후에 워치타워 조직의 특정 가르침에 주의를 환기시켰습니다. 이 가르침 중 일부는 특정한 때와 관련된 것이며, 지금은 용도 폐기된 것들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러한 가르침이 발표될 당시, 오류를 발견하고 수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처리되었습니까? 이러한 사람들에 대한 조직의 태도는 무엇이엇습니까? 다음 진술은 이에 대해 설명합니다.
(질문자가 사용한 "러셀 목사"라는 표현은 원문에 Pastor Russell로 되어 있습니다. 찰스 테이즈 러셀은 워치타워 조직 역사상 유일하게 "목사"칭호를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날의 여호와의 증인으로 불리는 당시 성경 연구생들도 그렇게 불렀고, 그의 뒤를 이은 협회장 러더포드 역시 그렇게 불렀습니다. 한국 지부는 이 표현을 "러셀 목사", "목회자 러셀", "패스터 러셀"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해 왔습니다.)
질문: 러셀 목사가 제정한 1874년 연도는 진실입니까?
대답: 아닙니다.
질문: 나중에 변경한 1914년이 정확한 연도입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질문: 러셀은 정확히 언제를 정한 것입니까?
대답: 그는 1914년을 이방인의 때의 끝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질문: 그는 1874년 또한 중대한 결정적 연도로 지정하지 않았습니까?
대답: 1874년은 통상적으로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의 연도로 이해하였습니다.
질문: 당신은 통상적으로 이해되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대답: 맞습니다.
질문: 이 말은 그 당시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라는 표현입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질문: 이제는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질문: 러셀 목사는 다니엘서를 해석할 때, 정확한 연대를 계산하지 못한 것입니까?
대답: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질문: 그렇다면 그는 다니엘서의 특정부분, 예를들어 7장을 7절로, 12장을 12절로 오해하였습니다.
대답: 7장을 7절로, 12장을 12절로! 무슨 말씀입니까? 그가 계산한 연대는 대부분 성경적 근거가 정확하였습니다.
질문: 1874년을 중대한 연대, 즉 그리스도의 임재의 때로 보았습니까?
대답: 아닙니다.
질문: 무슨 말입니까! 그가 그 연도를 지정하지 않았다니, 나는 당신의 말을 그렇게 이해했는데, 내가 잘못 이해한 것입니까?
대답: 그가 1874년을 정한 것은 성경적인 근거가 아닙니다.
질문: 그는 A.D 539년 동 고트왕국에서 발생한 일을 근거로 성경적 추리를 한 것입니다.
대답: 그렇습니다. A.D 539년 이라는 연도를 그 당시에는 통상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1874년은 성경적 근거가 아닙니다.
질문: 그렇다면 이러한 계산 방법은 협회의 통치체에서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대답: 정확히 그렇습니다.
질문: 내 말이 정확하다면, 때때로 기존의 이해와 입장을 변경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이런 잘못된 계산방법을 받아들였다면, 여호와의 증인들에게도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대답: 그렇습니다.
질문: 그렇다면, 현재 협회에서 출판물을 통해 진리라고 공표하는 내용들 중에 몇 년 안에 오류가 발견되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어떻게 됩니까?
대답: 우리는 기다려야 합니다.
질문: 그렇다면 여호와의 증인 통치체에서 최근에 몇가지 실수를 한 적이 있습니까?
대답: 그들은 성경에 대해 몇가지 잘못 해석한 적이 있습니다.
질문: 실수입니까?
대답: 실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한번 워치타워 협회의 출판물에 부여된 권위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다음 토론에서 보여줍니다. 이어지는 진술중에 부협회장은 "[증인들에게] 강제적 수용이 요구되지는 않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의 진술은 처음 입장을 번복한 것입니다.
대답: 회중의 일반 전도인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이 출판물에 포함된 내용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질문: 정식으로 전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침례를 받아야 합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질문: 그렇다면 침례를 받기위해서는 이 출판물들의 내용을 이해해야 합니까?
대답: 그는 이 출판물들에서 제시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해야 합니다.
질문: 이 출판물들에서 제시한 내용들은 성경을 해석한 것입니까?
대답: 이 출판물들은 성경 전체에 대한 설명입니다.
질문: 이 출판물의 설명들은 권위있는 것입니까?
대답: 증인들은 성경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 출판물들에 기술된 내용에 순종해야 합니다. 개인은 기술된 내용을 검토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경을 사용해서 기술된 내용이 성경적으로 지지받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질문: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합니까?
대답: "모든 것을 확인하고, 선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라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는 성경을 검토해보고, 진술된 내용이 성경적으로 지지를 받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질문: 협회의 입장을 종합해 보면,-잘못된 것이 있다면 수정해 주십시오.- 여호와의 증인 성원들은 성경과 협회 출판물들의 해석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합니까?
대답: 물론 그렇지만 그것은 강제적 수용을 요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증인들은 성경을 검토하고 그것이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지 확인할 그리스도인 자유가 있습니다.
질문: 만약 그가 이 출판물이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거나, 또는 반대의 경우 그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대답: 출판물에 기술된 내용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합니다. 이를 위해 성경구절을 기록합니다.
질문: 출판물과 성경사이에 부조화를 발견한 사람은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대답: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 소개시켜주십시오. 그렇다면 우리가 서로 변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질문: 그렇다면 개인이 출판물과 성서를 서로 비교해서 읽어보고 성경에 대한 자신만의 견해를 설명할 권리가 있다는 뜻입니까?
대답: 음... 그런 사람이 여기 온다면...
질문: 예, 아니오로 대답해 주십시오. 그런 권리가 있습니까?
대답: 아니오. 제가 이에 대해 변론할 수 있습니까?
질문: 예 원하시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대답: 출판물에 기술된 내용들은 성경적 근거가 제시됩니다. 그러므로, 개인은 성경을 살펴보고 기술된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나면, 사도행전 17장 11절에 기록되었듯이 그 문제에 대한 성경적 견해에 도달합니다. 베레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생각이 더 고상하여 그들이 받은 모든 말씀을 읽어보았으며, 성경을 조사해서 그 말씀이 합당한지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베레아 사람들의 고상한 태도를 본 받아, 성경을 조사하고 정말 그러한지 알아보도록 교훈받습니다.
질문: 증인들이 "파수대"와 자매지인 "깨어라" 에 실린 가르침들은 권위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면에서, 선택권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대답: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질문: 만약 어떤 사람이 오로지 성경에만 의존하고, 여러분 협회의 출판물과 간행물을 접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면, 그는 구원에 대한 희망이 없습니까?
대답: 그는 성경에 의존해야 합니다.
질문: 그는 성경을 참되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대답: 할 수 없습니다.
질문: 성경구절에 대해 당신과 공방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예수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증인측 진술에 따르면, 워치 타워 협회는 하느님의 통로이며, 출판물만이 현 20세기 지상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주장입니다. 출판물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하느님으로 부터 버림받고 멸망될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로지 부 협회장인 프레더릭 프랜즈 한 사람만의 진술입니다. 책임있는 다른 두 명의 임원을 조직 수뇌부에서 스코틀랜드로 보내서 증언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들의 증언은 부협회장의 증언과 일치합니까? 다음 법정 증인으로 협회의 법률고문인 헤이든 C. 코빙튼이 나섭니다. 다음 내용은 재판 도중에 그가 진술한 것입니다.
질문: 종교적 문제에 관해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필수적이지 않습니까?
대답: 당연히 그렇습니다.
질문: 당신의 종교에서 성서를 해석하는 견해가 때로 변경될 여지가 있습니까?
대답: 해석에 대한 견해의 변경이 있다면, 그것은 항상 성경적 근거에 의한 것어야 합니다. 예언이 성취되어감을 목격함에 따라, 우리의 견해도 점점 더 명확해 집니다.
질문: 여러분이 예전에 선전했던 말들, 즉 거짓 예언들을 용서한다는 것입니까?
대답: 우리가 거짓 예언을 한 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오류적 설명이 있었다면, 나는 그것을 실수라고 표현합니다.
질문: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실 때, 자신에 대한 예언을 이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도록 명확한 용어로 해석하였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으실까요?
대답: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공표하기 전에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항상 노력을 기울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정보를 검토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질문: 이 시점에서 잠깐 여러분이 공표했던 내용들을 따져봅시다.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리스도의 임재가 1874년에 발생했다고 믿지 않았습니까?
대답: 이 문제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합니다. 당신이 말한 사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합니다.
질문: 프랜즈씨의 증언을 들었습니까?
대답: 프랜즈씨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가 말한 내용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가 말한 내용을 인정하지만, 당신이 그에게 들은 내용이 내가 아는 전부입니다.
질문: 나를 기만하는 겁니까?
대답: 내가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오늘 법정에서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질문: 여러분의 전파활동에 관한 서적들을 연구한 적이 없습니까?
대답: 있습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닙니다. 일곱권으로 된 「성경 연구」는 연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언급되고 있는 1874년의 사건에 대해서는 연구한 적이 없습니다. 이 사건은 전혀 생소한 사건입니다.
질문: 내가 알기로는 협회는 그리스도의 임재가 1874년이라는 것이 신뢰할 만한 것으로 광고하지 않았습니까?
대답: 그러한 추정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추측성 설명이었습니다.
질문: 그 당시 출판물이 거짓 예언을 한 것입니까?
대답: 그 당시 출판물이 잘못된 예언을 한 것입니다. 그것은 잘못된 설명 즉 오류적 설명이었습니다. 예언이 성취되지 않았기 때문에, 잘못된 즉 오류적 예언이었습니다.
질문: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 전체가 그 예언을 믿었습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한 가지 이해해주셔야 할 점은, 우리는 연합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군대가 행진하듯이, 수 많은 사람들이 모든 행로에서 연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질문: 여러분은 세상의 군대를 믿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대답: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을 하늘의 군대라고 믿습니다.
질문: 당신은 세상의 군대를 믿습니까?
대답: 그점에 대해서는 말씀드린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반대하라고 전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세상의 군대는, 오늘날 세상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사탄의 조직의 일부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참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부들이 자국의 군대를 보유할 수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전쟁을 반대하도록 전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그것으로 부터 분리되도록 촉구합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질문: 이제 요점으로 돌아와 봅시다. 거짓 예언이 광고된 적이 있습니까?
대답: 동의합니다.
질문: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까?
대답: 분명히 그렇습니다.
질문: 만약 여호와의 증인 중에서 그 예언이 잘못되었다는 견해를 갖고 그것을 말한다면, 그는 제명처분을 당합니까?
대답: 예. 만약 계속해서 그렇게 주장하고 문제를 일으킨다면 제명처분을 당할 것입니다. 왜내하면 오류가 있다할지라도, 조직 전체가 동일한 사상을 믿고 있는데, 다른 누군가가 자기 자신의 사상을 지속적으로 주장한다면, 연합은 깨지고 문제가 발생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조화롭게 행진할 수 없습니다. 변화는 적절한 근원 즉 조직의 머리인 통치체로 부터 나와야지, 아래로 부터 위로의 개혁은 안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사상을 갖는다면, 조직은 분열되고 수 천가지 다른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우리의 목적은 연합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질문: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연합을 유지해야 합니까?
대답: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연합을 유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호와 하나님께 우리 조직을 사용하고 계심을 믿고 확신합니다. 심지어 때때로 실수가 있더라도, 우리 조직의 통치체를 인도하고 계십니다.
질문: 그렇다면 이것은 거짓 예언에 대한 강제적 수용에 근거한 연합입니까?
대답: 솔직히 인정합니다.
질문: 만약 침례받은 전도인이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표현해서 제명당했다면, 계약이 파기되는 겁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질문: 어제 분명히 말한 것처럼, 그들은 죽어 마땅합니까?
대답: 제 생각에는......
질문: 예, 아니오로 말해 주십시오.
대답: 나는 확신을 가지고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질문: 여호와의 증인은 종교입니까?
대답: 분명히 그렇습니다.
질문: 그것은 그리스도교입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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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실수들과 관련해서, 수년 동안 협회에서 근거로 삼아온 성경에 대한 권위 있는 해석들 중에서 상당부분 오류가 있었음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오류가 있었음에 동의하십니까?
대답: 예.
질문: 당신이 동의한 것처럼, 언제든지 협회의 권위있는 해석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은 협회로 부터 추방당해야 마땅합니까? 그리고 이에 뒤따를 심각한 영적인 결과에 책임져야 합니까?
대답: 예. 나는 그렇게 말하였고, 그것을 거듭 진술하였습니다.
협회 대변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연합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이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거짓이라고 믿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일 것을 요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읽었든 간에, 조직의 권위있는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표현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명확히 확인했더라도,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아래로부터 위로가 아니라, 합당한 근원, 즉 조직의 머리인 통치체로 부터" 정책의 변화가 있을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성서에서 무엇을 읽었든간에, " 합당한 근원" 즉 통치체에서 믿음과 토론을 허락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이러한 놀라운 주장은 정당한 것입니까? 심지어 "거짓 예언에 대한 강제적 수용"을 하면서 까지, 즉 "어떠한 댓가를 치르더라도 연합"을 유지해야 합니까? 이것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지 않는 사람들은 제명처분 당하고 "죽어 마땅" 합니까?
예를 들어, 만약 주인이 고용한 "종"이 주인의 말씀과 다르게 말한다면, 주인이 직접 작성한 말씀을 읽은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명령에 따를 수 없습니다. 이것이 명백히 앞서 언급한 조직의 관념입니다.
세번째 증인이 법정 증인석에 섰습니다. 재무이사, 그랜트 수터가 마지막으로 협회를 대표해서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진술은 공적인 지위에 대한 진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질문: 존경받을 만한 회중의 종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있습니까?
대답: 그러한 사람은 먼저 몇가지 자격조건을 시험받고 충족시켜야 합니다. 성숙함, 지각력, 영적 이해력 그리고 회중을 이끌수 있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는 먼저 언급된 신권전도 학교에서 훈련받아야 하고, 야외봉사의 인도자가 되고, 가르치는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요구 조건은 성경에서 규정한 것들입니다. 아시다시피, 성경에서 규정하지 않은 자격 조건을 인간이 규정할 수 없습니다.
질문: 개괄적인 표현들이군요. 좀 더 현실적인 절차들을 지적하자면, 그는 신권전도학교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나요?
대답: 참석해야 합니다.
질문: 그는 회중의 도서관을 이용할 수 있습니까?
대답: 예
질문: 그는 협회의 출판물을 사용하는데 능숙해지도록 기대되지 않습니까?
대답: 물론 그렇게 해야합니다.
질문: 사실 여호와의 증인으로써 자신의 성서에 대한 이해와 협회 출판물사이에 괴리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습니까?
대답: 그럴수 없습니다.
질문: 오직 출판물만이 성서를 해석할 권리가 있습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질문: 출판물도 각색된 것 아닙니까?
대답: 아닙니다.
질문: 1874년을 중대한 문자적 연대로써 오류가 발견되었다는 증거들에 대해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1925년도 잘못된 연도입니다. 이 두차례의 경우, 그 당시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이 연도를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요구되지 않았습니까?
대답: 그렇습니다.
질문: 이러한 연도를 받아들이도록 한 것은 잘못된 것 아닙니까?
대답: 전체 다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잘못이 지적된 점들은 실수에 의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반적인 결과입니다. 펜실베니아 주에서 협회가 설립된 이후, 협회의 전체 역사를 통해서 여호와의 증인들은 전파사업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의 말씀과 의로운 전망으로 획기적으로 전환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옳다고 알고 있는 것을 지키도록 영적인 힘을 주었습니다. 또한 왕국을 선포함으로써 여호와의 이름을 드높였습니다. 핵심적인 문제,즉 여호와의 숭배에 있어서 비견할 만한 차이점이 없다면, 그외 다른 것들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그것은 전 역사를 통해 수 많은 사람들과 여호와의 증인들의 정신에 깊이 새겨진 것입니다.
협회의 재무이사는 "성경에서 규정하지 않는 요구 조건들을 인간이 규정할 수 없습니다." 라고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앞선 두명의 협회임원들과 마찬가지로, "오로지 워치타워 협회"만이 올바로 성경을 이해할 수 있다고 진술하였습니다. 거짓 예언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 당시 주장을 절대적 진리로 받아들이도록 요구되었으며", 이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합니다.
재무 이사는 "중요한 것은 전반적인 결과입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따라서 조직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에 따르면, "핵심적인 문제, 즉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숭배"가 "결정적 연대"라고 광고했던 그들의 실수를 덮고도 남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핵심적 소식을 무시하고 그들의 실수를 부각시키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재무 이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외 다른 것들을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후반부의 주장은 그럴듯 해 보입니다. 그러나 수터의 진술은 다른 두 명과 마찬가지로, 조직은 스스로에게 상당한 관용과 적절한 배려를 요구하면서 균형잡힌 평가를 바랍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기를 거부함을 보여줍니다. 스스로에게는 관용을 바라면서도, 오류적 가르침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다른 성원들에게는 관용을 베풀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제명처분을 하고, 끊어져서 죽어 마땅하다고 정죄합니다. 사실상, 아무리 철저하게 그리스도인 사상을 받아들이고, 아무리 진실하고 헌신적으로 "여호와를 숭배" 했는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폐쇄적이고 극단적이며 엄청난 양의 조직의 사상 전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조직은 자신들의 사상을 이분법적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그 사상에는 오류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제명을 당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합니다. 조직은 자신들이 출판했던 "연대적" 오류는 평가절하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동일한 실수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엄청나게 중요한 점에서 모순적이 되었습니다. 경고로 충분한 사람들에게 제명처분을 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의 종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말한 거짓 예언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시겠습니까? 참으로 하느님으로 부터 나온것인지 "모든 것을 확인하고 선하고 참된 것을 굳게 잡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미워하신다는 생각은 분명히 이상한 생각입니다. 아무리 진실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조직으로부터 제명된다면,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기에 합당치 않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믿을수 없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위의 진술에 따르면 이러한 주장이 가능해집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잠언의 원칙을 상기해야 합니다. "두 가지 저울추는 여호와께 가증한 것이고, 속이는 저울은 좋지 않다." [잠언 20:23] 합리적으로 생각해 볼때, 하느님께서 물건을 팔 때와 살 때 부정직하게 다른 저울을 사용하는 일상적인 상거래에 대해서도 가증하게 여기신다면, 사람들의 영적인 관심사에 관련된 일을 다룰 때, 얼마나 더 강력하게 이러한 원칙을 적용하시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관용을 요구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무척 까다로운 표준을 요구하고 제시한다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느끼시겠습니까! 하느님의 진정한 종, 예수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여러분도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헤아려 줄 것입니다." [마태 7:2]
이번 재판 뿐만 아니라 종종 다른 경우에도 워치 타워 조직은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자신들의 실수를 넘어가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러한 실수들에 대해 균형잡힌 견해를 갖도록, 그리고 다른 수 많은 호의적인 요소들이 자신들의 실수를 덮어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표준들을 자신들의 권위 아래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용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워치 타워의 가르침과 일치하지 않는 견해를 갖는다면, 언젠가 실수를 시정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명 처분의 근거로 판단합니다. "전반적인 상황"이 보여주는 사실은, 진정한 그리스도인 특성을 나타내지만 조직에 동의하지 않는 개인을 적절하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는 조직에 동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은 이러한 이중적이고 불평등한 표준의 적용을 승인하지 않음을 명확히 알려줍니다.
스코틀랜드 재판에 관련된 쟁점의 심각성을 고려해 볼 때, 세명의 공식 법정 증인들이 단순히 개인적 견해를 피력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사용한 언어적 한계를 어느 정도 고려하더라도, 이 특별한 법정을 통해 협회가 성취하고자 했던 목적중에는 '기성 종교'로 인정 받고자 하는 욕망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조직의 권위적인 정책, 즉 자신들 내부에 팽배해 있는 율법주의를 표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의 기록들, 그리고 내 자신의 통치체 성원으로써의 경험은 그것을 확증해 줍니다.
워치 타워 협회 임원들의 진술중 일부 내용은 초대 협회장이었던 패스터 러셀이 자신의 임기 후반부인 45년전에 기술한 내용을 상당부분 반영한 것입니다. 1910년 9/15 파수대(영문) 기사에서, 초대 협화장은 올바로 성경을 읽는 것의 가치를 6권으로 된 자신의 저서인 「성경 연구」를 읽는것의 가치와 비교합니다. 그의 평가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사도들이 아무리 선하고 아무리 현명했더라도 결코 알지 못했던 것들을 이 시대에 우리에게 제공하십니다. 만약 우리가 지금까지 계승 발전시켜온 가르침의 통로를 무시하는 것은 우리의 심판 날에 주님의 마련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는 스스로 판단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판단은 모든 부면에서 자신의 행동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6권으로 된 「성경 연구」는 실용적으로 성서를 주제별로 정리한 것이며, 성경적 근거 귀절들을 제시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6권의 책들을 정리된 형태의 성경이라고 이름 붙인다 하더라도 부적절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이 책들은 성경에 대한 해설이 아니라, 실용화된 성경 자체입니다. 왜냐하면 개인적 기호나 개인적 지혜에 따른 교리나 사상을 만들고자 하는 욕망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통로, 그 자체만을 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형태의 독서, 이러한 형태의 교훈, 이러한 형태의 성서 연구를 따르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사람들이 성서 자체만을 읽어서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성경 연구」를 제쳐두고, 성서를 사용하고, 성서에 익숙하고, 십년동안 성서를 읽었다 할지라도 그러합니다. -- 만약 그가 「성경 연구」를 제쳐두고 그것을 무시하고 성서 자체만으로 돌아간다면, 그가 십년동안 성서를 이해했다할지라도, 우리의 경험상 볼 때, 그는 2년안에 어둠속으로 들어갈 것입니다. 반대로, 그가 단지 「성경 연구」만을 읽고 참조한다면, 그리고 성서를 한 페이지도 읽지 않더라도, 그는 2년안에 빛에 거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성경의 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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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모두를 하나님이 가르치실 것입니다."
"우리의 현실적인 결론은, 「성경 연구」가 밝혀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서에 대해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일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한장 한장 통독하는것은 아무런 소득이 없으며, 엄청난 시간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를 한꺼번에 연구하려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성서를 통독하기보다는, 과거에 우리 자신과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증명된 방식을 따르고자 생각할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훌륭한 방식과 더 많은 정보로 우리의 주의를 이끈다면, 그 또한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고, 성서에 대한 이해를 하도록 이끄시는 동일한 하늘의 아버지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 또는 매년 신약을 읽는 것을 필수적인 것으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이러합니다. '그들 모두를 하나님이 가르치실 것입니다.' 라는 말을 그분의 기름부음 받은 자들에게 적용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의 주의를 신성한 진리의 특성으로 이끄실 것입니다. "믿음의 가족들에게 정해진 때에 이르도록"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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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연구」책은 성서의 대체물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 연구」를 성서의 대체물로 지정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성경을 대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경 연구」는 끊임없이 성경을 참조합니다; 누군가가 이러한 참조에 대해 의심이 생긴다거나 혹은 자신의 기억과 일말의 차이가 있다면, 그는 자신의 기억을 확인해보아야 합니다. 사실상, 자신의 모든 생각이 성서와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 단순히 「성경 연구」와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성서와 일치해야 합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수 많은 진리의 동료들이 「성경 연구」를 매일 12장씩 읽는 것을 습관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행로를 따르고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벽회 및 증거집회, 일요일 집회, 순례자 모임, 베레아 성서 연구 그리고 「일용할 만나」책 등) 우리가 알기로는 (그러한 습관을 유지하는 사람들 중에) 진리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오래 전부터 알았던 사상을 지금은 사실상 절반밖에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읽었던 것들을 절반 이상을 잊어버렸으며 더듬거리고 있습니다.――바깥 어둠속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의 의도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장들에 대해서 심사숙고 하는 사람들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또 다른 진리의 빛을 바라면서, 이해를 보류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완벽한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수 주 또는 수 년을 사용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빛을 받을 기회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가 갖은 것은 모두 잘못된 것입니다."
(위 파수대 기사 중에 나오는 "새벽회"란 매주 금요일 저녁에 열렸던 집회로서, 「천년기 새벽」책들을 연구하는 모임이었습니다.그 책들은 나중에「성경 연구」라는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증거 집회"란 보통 수요일 저녁에 열리던 집회였는데 다른 말로는 "가내 집회" "기도 집회" "찬양 집회" 등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또한 "순례자"란 1897년부터 시작된 것으로서, 그들은 워치타워 협회의 대표자들로서 여러 지역의 모임들과 회중들을 방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011년 현재의 순회 및 지역감독자에 해당합니다.)
나는 1979년 통치체 회의에서야 이 진술들에 대한 명확한 언급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협회장 프랜즈는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하나의 요점의 근거로 이것들을 언급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패스터 러셀(=목사 러셀)은 누군가 성서 자체와 협회의 출판물중 하나를 선택해서 지녀야 한다면, 협회 출판물을 선택하는것이 더 낫다라고 종종 말하곤 했습니다."
그 당시 나는 이러한 기사가 어떤 정당성을 갖고자 할때 마다 반복된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나중에 1910년도 파수대를 살펴보고나서야, 조직은 얼굴을 붉히면서 이러한 기사를 다시 불러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러셀에 의해 기술된) 파수대 기사의 분명한 논점은 성서 자체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목적을 배우는 것은 거의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러셀의 저서인 「성경 연구」를 제쳐두고 성경만을 읽는 사람은, 경험상, "2년 안에" 어둠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 연구」를 읽는 사람은 2년 동안 성경에는 손도 대지 않더라도, 빛에 거할 것입니다. 성서를 한 장 한 장 읽는 것은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지 않지만, 「성경 연구」를 정기적으로 매일 읽는 것은 권장됩니다. 이것은 "주님의 마련"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따르면 워치 타워 협회장이 기사를 통해 입장을 표명하기 전에는, 지상에 있는 그 누구도 성서를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러셀이 저술한 모든 출판물중 단 한권도 워치타워 협회에서 출판하지도 보관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1910년에 협회장이 표명한 견해는 근본적으로 1954년 스코틀랜드에서 그리고 또한 1979년 통치체 회의에서 반복되었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차이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개인과 그의 저술에서 "조직"으로 초점이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워치 타워 협회의 출판물들이 필수이며, 성서를 이해하기 위한 대체할 수 없는 요구조건이라는 주장은 여전합니다. 여전할 뿐만하니라 놀랄만한 독단주의로 발전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러한 출판물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것을 생명을 얻기 위한 하느님의 요구사항으로 묘사합니다. 러셀 시대의 상황과 달리, 이제는 동의하지 않을 경우 제명처분에 이르게 됩니다.
한참 후인 1979년, 정확히 11월 17일, 그날 나는 서 아프리카로 "지역" 순회 여행을 떠났습니다. 당시 협회장이었던 프레더릭 프랜즈는 브루클린 본부 가족들을 위한 아침 성서 토론을 사회하였습니다. 그는 몇가지 논평을 하였는데, 참석했던 성원 중에 한 명이 그것을 기록했다가 내가 돌아왔을 때 나에게 전달해 주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었습니다.
" 일부 사람들은 현재 성경을 읽어야 한다고, 즉 "성서 자체"만을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글쎄요, 이것은 그리스도교국의 교회들이 수 세기동안 사람들에게 이야기해 온 것이며 그것이 가져온 혼란을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가 되기 오래 전부터 워치 타워 책자 협회였습니다.[협회의 원래 이름은 시온의 워치 타워 책자 협회였다.] 우리가 실제로 성경을 출판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협회가 존재하는 유일한 목적은 1914년에 설립된 왕국을 선포하고 큰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경고의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파해야할 특별한 소식이 있습니다."
브루클린 본부에서 아침 모임을 사회하면서, 나는 자주 성서 자체를 더 많이 읽어야한다고 말하면서, 성서를 지식의 진정한 원천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최종 권위로써 강조하였습니다. 나는 이런 주장이 조직의 이익에 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내 생각에 강력하고 잊을 수 없는 원칙이 제시된 1946년도 파수대(영문) 기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1946년 11/1호, 330 페이지.] "하나님이 참 되심을 증명하십시오."라는 제목의 기사는 자신들이 "항상 모든 진리의 통로"라는 유대인과 가톨릭 모두의 주장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기술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 37.그러므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이나 종교적 조직들이 사적으로 해석한 전통들을 첨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 없이 성서만으로 충분하다고 우리가 말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권위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영감받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충실한 동료 일꾼, 디모데에게 이점에 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아기부터 거룩한 기록들에 친숙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기록들은 그리스도 예수와 관련된 믿음을 통하여 그대를 지혜롭게 하여 구원을 얻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모든 성경은 하느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가르치고 책망하고 사물을 바로잡고 의로 징계하는 데 유익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사람이 온전히 유능하게 되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하여 완전히 갖추게 해 줍니다." (디모데 둘째 3:15-17) 성서의 경전에 종교인들의 구전되는 전통들을 첨가할 필요성이 있었다면, 바울은 성경이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분에 대한 믿음과 헌신에 있어서 완전하게 해준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성경은 미흡한 것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사람들은 여전히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가 그리스도인 관점에서 훌륭하게 장성하도록, 바울은 그에게 성경의 말씀을 올바로 다루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도록 교훈합니다. "그대 자신을 승인받은 사람으로, 진리의 말씀을 올바로 다루며 아무것도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일꾼으로 하느님께 바치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십시오." (디모데 둘째 2:15) 그분의 증인으로써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 역시 이러한 진실된 교훈을 따라야 합니다."
방임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권위
" 38. 이제 최종적으로 우리에게 초점을 맞춰봅시다. 우리중 일부는 교회적 체계나 교직자 조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리 종교적 전통에서 벗어났다 할지라도, 각자 개개인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 해석하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여전히 충실한 사람들의 보이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을 명확하게 밝혀주는 "살아있는 교권(敎權)"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각자 개개인의 성경에 대한 해석을 허용한 결과, 개신교가 얼마나 종교적으로 분열된 상태인지 보십시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개신교에 다양한 종파와 분파가 생긴 것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소유하고 적절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이 분열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성경은 분열적인 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조화로우며 모든 경전들 하나 하나가 일치합니다. 그리스도교국의 천주교와 개신교의 종교인들 사이의 분열적인 영향력은 그들이 따르는 종교적 전통에 기인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당신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그 당시 자신을 따르는 자이든 나중에 믿게 될 자이든, 자신을 믿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해야 한다고 기도하십니다. 마치 그분과 하늘의 아버지가 하나인것과 같습니다. (요한 17:17-23) 현재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하나되는 일은 성취되어야 합니다; 현재는 이 세상의 마지막 때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여호와의 증인들에 의해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종교적 조직의 안 밖에서 나오고 있으며 그들의 이전 종교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현재 하나님을 섬기는데 연합되고 있습니다.
39. 이점은 어떻습니까? 현재 각자 개개인의 성경에 대한 해석의 불일치는 어떻게 극복하거나 피해야 합니까? 보이는 인간 조직이나 보이는 인간 지도자를 통해서 해결해야 합니까? 대답은 아니오 입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라,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더 높은 차원의 권위로 인식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양심의 거리낌이 없도록 그분들에게 순종해야 합니다.(로마 13:1)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살아계신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 최고의 주권자로 인식해야 하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분의 임명된 왕으로 또한 선택된 구원자로 인식해야 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백성들에 대한 인도자와 지도자로 임명하셨습니다. (이사야 42:1; 55:3,4; 마태 12:18; 사도 13:34) 또한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지상의 자신의 회중에 대한 살아계시고, 현존하시는 스승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회중"을 그들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르치십니다. -- 이사야 54:13; 요한 6:45
40. 따라서 여호와의 증인은 종교적 교직자들이 자신들처럼 종교적 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교권 즉 가르치는 직분, 또는 "신성한 임명을 받은 관리인 혹는 성서의 해석자" 를 지지하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개개인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절대적인 인도자의 직분만으로 충분하다" 라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직자들의 이러한 종교적 전통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더 높은 차원의 권위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회중에 대하여 말한 영감받고 절대적인 묘사를 받아들입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혹시 지체될 경우에 그대가 하느님의 집안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집안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회중이며, 진리의 기둥과 버팀대입니다." (디모데 첫째 3:15)"
나는 "교직자 조직"의 주장에 대한 파수대 기사의 반응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첫번째,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각자 개개인이 스스로 성경을 해석하도록 두어서는 안됩니다."
두번째,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는 교권" 즉 가르치는 권위로써의 역할을 수행할 보이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세번째는 이러합니다.
"성경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은 사람들에게 분열적인 영향력을 줍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 「파수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실이 아닙니다."
분명한 어조로 분열을 피하는 방법은, "보이는 인간 조직을 세워서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식을 통해서라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단호하게 「파수대」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이렇게 선포합니다.
"[여호와의 증인은] 종교적 교직자들이 자신들처럼 종교적 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교권 즉 가르치는 직분, 또는 "신성한 임명을 받은 관리인 혹는 성서의 해석자" 를 지지하는 주장을 하지 않습니다. '개개인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절대적인 인도자의 직분만으로 충분하다" 라는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1946년에 이러한 원칙에 대한 기사 내용을 읽었을 때, 나는 전적으로 동의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이러한 원칙들을 지키며 살고 있는 집단적 모임이 있었다면 온 영혼을 다해 지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사실이 아님을 나에게 확신시켰습니다. 그들은 바로 이러한 원칙의 기사 내용을 출간했던 사람들 입니다.
"하나님이 참되심을 증명하십시오"라는 기사의 저자는 프레더릭 프랜즈였습니다. 이 기사는 용감하고,분명하고,진보적인 내용이었지만, 이 모든 내용은 사실상 단지 8년 후 스코틀랜드에서 워치 타워 협회의 3명의 대표자들에 의해 완전히 부정되었습니다. 그들은 뒤따르는 파수대 기사를 하나 하나 거부한 것입니다. 나는 통치체에서 9년을 보내기 전까지 이러한 거부가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통치체 성원들은 내가 1946년에 선포된 이러한 과감한 기사 내용의 원칙들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었지만 결코 실제로 행하지는 않았습니다.
현재로부터 과거로 조사해보면, 1946년도 이후에는 그리스도인 자유에 대해 그토록 강력하게 지지하는 기사를 발견할 수 없으며 심지어 비슷한 내용도 없습니다. 왜 입니까? 무엇때문에 이러한 변화와 모순이 생겨났습니까? 어떤 조직이 이토록 명확한 규정과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가, 불과 몇 년만에, 이처럼 극적으로 정반대 입장을 취합니까? 세상 어디에서 자신들이 다른사람들에게 "교직자적" 영이라고 비난했던 것과 똑같은 주장을 자신들이 합니까? 어떻게 종교적으로 헌신한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그러한 행로를 취할 수 있으며 동시에 자신의 동료 성원들에게 어떠한 설명도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까? 사과도 없이 심지어 이전에 강력하게 주장했던 입장에 대한 최소한의 논박조차 없습니까?
부분적으로, 이것은 변덕스러운 감정들, 즉 사람들 자신의 기질과 견해 때문입니다. 이런 일들은 특히 1942년에서 1975년 사이에, 정책들이 매우 개인적으로 결정되면서, 즉 주로 두 사람 네이선 노어와 프레더릭 프랜즈에게 집중된 이후에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후자의 경우 교리화의 주된 원천이었습니다.[통치체 성원인 칼 클레인은 통치체 회의에서 프랜즈를 조직의 "신탁"으로 언급합니다.]
이처럼 강력하게 권위주의적 방식이 표면화된 것은, 예측할 수도 없고, 심지어 불안정한 인간적 감정과 기질보다도,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나는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인간 행동의 패턴으로 설명됩니다. 이 패턴은 수세기를 통해 가장 우울한 규칙들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기성 종교 즉 종교를 떠난 사람들의 모임이 나타내는 패턴입니다. 그들은 성서가 자신들의 하나뿐인 결정적 지침이며, 자신들의 유일하고 참된 귄위있는 정보의 원천이라는 공개적 결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나서 성원들이 증가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단체가 됩니다. 그들은 점점 여러가지 가르침들을 쏟아냅니다. 이제 그것을 "진리"라는 표준으로 확립합니다. 그리고 개인의 그리스도인 정신을 측정하는 결정적 근거로 사용합니다.
이러한 것들을 보완하기위해 권력의 구조가 동시에 발전하게 됩니다. 그들은 모든 성원들이 자신들이 정한 가르침들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극단적인 경우, 마지막에는 성원들이 읽고, 연구하고, 말하고, 가르치고 행동할 모든 것을 규정하고 이러한 구조에 집착하도록 만듭니다. 이제 그것을 정당한 권위로 여기며 그러한 인간적으로 확립된 표준들을 지지하지 않는 자들을 훈계합니다. 결국 이러한 모임은 자신들이 원래 떠났던 기성 종교와 매우 똑같아 집니다. 이것이 현존하는 많은 종교들이 발전해 온 패턴입니다.
이러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패턴은 초기 그리스도인 회중의 모습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것이며, 오히려 붕괴를 가져온 가장 근본적인 요인입니다. 이것은 형제애를 변질시키며, 사랑의 띠와 핵심적 믿음들에 대한 일반적인 동의만으로 이루어져야 할 연합을 교직자적 종교로 변화시킵니다. 즉 철저하게 제도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요인은 바로 자신의 의지를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경향때문입니다. 이러한 경향을 예수께서 발견하시고, 제자들에게 경계하도록 반복적으로 권고하셨습니다. 내가 믿는 이러한 결론은 성경과 역사 모두를 통해 지지됩니다.
그리스도인 자유를 찾아서
제 3장
중앙 집권화된 권위
"어느 날 예수께서 성전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시며 좋은 소식을 선포하고 계실 때에,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연로자들과 함께 가까이 와서 그분에게 말하기를 “당신이 무슨 권위로 이 일들을 하는지, 또 누가 당신에게 이 권위를 주었는지 우리에게 말하시오” 하였다." ―― 누가 20:1,2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 당시에 그분과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있었던 분쟁의 핵심 쟁점이었습니다. 그들은 권위를 자신들에게 집중된 것으로 여겼으며, 자기들이 선택적으로 위임한 사람들에게도 (권위가) 연장되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자신들의 권력 구조를 위협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들에게 그분은 이방인이었고, 종교적 선동가였으며,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지위를 손상시키는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이단적이고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연로자들이 세운 표준과, 하느님의 계약 백성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위해 선생들이 발전시켜온 해석에 부합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후, 수 세기를 걸쳐서 동일한 쟁점이 반복적으로 제기되어 왔습니다. 놀랍게도, 한 때 용감하게 "권력의 폭정"에 저항했던 사람들이, 나중에는 종종 그들 자신도 타락하게 됩니다. 그들은 인간적인 관점에서 "실용적"으로 보이는 것이나, 또 다른 경우 다른 사람에 대한 권력을 제공하는 기회에 설득당합니다. 그러한 일이 발생하면, 진리는 가증스러운 추리들과 궤변으로 대체됩니다. 양심은 편의주의에 길을 내어주게 됩니다. 고결함은 현실주의로 교체되고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견해를 갖게됩니다.
1975년과 1976년에 걸쳐서, 여호와의 증인 조직은 폭풍과 같은 시기를 지냈습니다. 이로 인해 최상층부를 조직 중심적 운영체계로 완전히 재정비하게 됩니다. 협회장의 독점적 지배력이 여호와의 증인의 통치체라는 집단적 지배력으로 교체됩니다.[「양심의 위기」영문. 50-94 페이지 참조] 이 기간동안 나는 이전 어느 때 보다도 심각하게 권위라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 회중내에 존재했던 권위는 결코 내 의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분명히 그러한 용어를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성취하기 위한 어떤 종류의 권위이었습니까? 그리고 어떠한 제한들이 있었습니까? 나는 다섯명으로 구성된 통치체 성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들은 조직적 운영체계에 대한 쟁점을 공개적으로 제안하였습니다. 이 위원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결정에 동의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마치 하나의 몸처럼 움직이길 원했습니다. 내가 그 협약서에 포함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성구가 계속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랍비라고 불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선생은 오직 하나이며 여러분은 모두 형제입니다. … 또한 '지도자'라고 불리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지도자'는 하나이며 그리스도입니다. [마태 23:8,10]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라들의 통치자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그 큰 자들은 그들 위에 권위를 휘두릅니다.여러분 가운데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도리어 여러분 가운데서 누구든지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 20:25-27]
나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어떠한 방법으로든 형제 관계를 왜곡한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어떤 형태의 직분이나 공적 지위도, 스스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다른 영적 수준으로 높이는 것이며, 어쨌든 자신의 추종자들의 유일한 주인이자 스승인 하느님의 아들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기에, 그것은 그리스도교의 영에서 벗어난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 성경에서 발견되는, "목자", "가르치는 사람"("교사"-개역한글), "예언자", "장로"(혹은 "연로자") 등과 같은 명칭들은 무엇입니까? (에베소4:11; 디모데 첫째5:17 참조) 이러한 모든 묘사들은 사실상- 권력 구조에서의 공직 즉 공적인 지위가 아니라- 형제들의 공동체에 바쳐진 봉사들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즉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그들이 갖춘 자질과 능력입니다. 이러한 봉사들 드렸던 사람들의 권위는 자신들을 형제들의 영적 머리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다른 누구도 될 수 없습니다. [고린도 첫째 11:3; 비교 고린도 첫째 12:4-11,27-31]
이러한 봉사, 재능과 능력은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장성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갓난아이에 남아있어서는 안 되며, 이어서 스스로 생각하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고, 자결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결국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자로 변해야 합니다. [비교 에베소 4:11-16; 고린도 첫째 3:1-3; 히브리 5:12-14.] 그들은 하느님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있어서, 어른이 아니라, 어린 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회중적 교제의 유일한 목적은 자신의 성장을 도모하여 "장성한 사람"이 되고 자결권을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성장한" 남자나 여자는 합당하게 그리스도의 영적인 머리직분이외의 다른 어떤 것의 필요성도 인식하지 못합니다. [마태 18:3; 23:9; 고린도 첫째 14:20; 16:13; 에베소 4:14.]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가족 관계의 용어를 사용하여 묘사합니다. (디모데 첫째 5:1,2) 그리스도인 경험과 연륜에서 장성된 형제들은 가족내에서 나이 많은 형제들이 하는 방식으로 섬기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약 가장이 자리를 비웠다면, 가장이 남겨준 교훈들을 지키도록 가족들앞에서 맏아들에게 위임할 수 있습니다. 가장은 자신이 말한 부탁들과 교훈을에 고착하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맏아들은 주제넘게 가장처럼 행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즉 가족의 주인처럼 굴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가족들에게 가장이 정하고 남겨준 것을 넘어선 행동 규범을 정할 권리를 가진 것처럼 행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로지 가장에게만 합당한 구별과 복종을 결코 (가장이 아닌 맏아들이) 기대하거나 주장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가족과 집안에서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머리와 주님으로 여기고, 그분이 개인적으로 혹은 자신의 선택한 제자들을 통해서 주신 교훈을 따라야 합니다. [고린도 첫째 11:3; 에보소서 4:15,16.]
나는 1976년까지 여호와의 증인의 조직 운영에 팽배해 있던 "군왕적" 형태의 주요 책임이 만연한 권위주의적 분위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75-76년의 획기적인 재정비 이후에 내가 실수했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나의 진실한 바람은, 새로운 마련이 성과를 내거나, 적어도 길을 예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태도와 영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 동정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종속적인 존재로 취급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최종 결과는 필연적으로 단지 권력을 나누거나 분산시키는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해 졌습니다. 집의 내부는 리모델링 되었지만 ― 여전히 동일한 집이었으며, 근본적인 특성들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권위주의적 구조, 즉 과거의 접근방식과 태도들은 여전히 남아있었으며, 사실상 오히려 더 명확해졌습니다.
협회장, 한 사람에 대한 강조에서, 사람들로 된 통치체를 강조하는 전환은, 처음에는 다소 신선한 변화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통치체"라는 용어의 섬뜩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중 이러한 "타이틀"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이전 어느 때보다도 더 큰 구별과 주목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때때로 심지어 집회에서 기도중에, 형제들이 자신들이 받은 것에 대해 "하느님과 통치체"에 감사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을, 두드러지게 하는 대신에 (원했을 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뒤로 물러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분께 충분한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우리를 인도하고, 가르치며, 보호하는 수단인 성령을 받고자 하는 더 간절한 인식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것과는 동떨어져 보였으며, 사실상 기도가운데 성령에 감사하는 언급도 없었습니다. 통치체에서 나에게 운영 방식의 재정비에 대한 임명을 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뭐라 말할 수 없는 혼란을 느꼈으며, 내가 본 것들 때문에 모든 책임들에 대해 섬뜩함을 느꼈습니다.
한번은 통치체 회의에서, 이 쟁점이 좀 더 간접적인 방법으로 제기 되었습니다. 협회장은 '성서만을 가지고 있는 것보다 협회 출판물중 하나를 가지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라는 발언을 하였습니다. 이 특별한 회의에서, 칼 클라인(Karl Klein)은 매우 호들갑스럽게 에드워드 던랩을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에드워드 던랩은 집필 위원중 한 명이었으며 길르앗 학교의 전 교무 담당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작성한 기사가운데서 "통치체"라는 타이틀 대신 "장로 중심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하였습니다. (물론 에드는 통치체 성원은 아니었으며, 자신에 대한 비난에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던랩이 이러한 기사를 쓴지 2년 정도의 시간이 흘렸으며 클라인은 이미 이전 회의에서 두차례 문제를 제기하였습니다. 그는 이제 매우 격앙되어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가 연설할 때 잠자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동료 성원들에게 상기시키면서 자신이 너무 큰 소리로 격양된 것을 변명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표현을 따르자면, "통치체"라는 용어를 배제시키려는 드러나지 않는 움직임에 큰 염려를 나타냈습니다. 다양한 성원들이 대부분 부르러운 어조로 의견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들 중에서, 나는 이 문제가 쟁점이 될 만한 이유를 전혀 찾지 못하겠다고 지적하였습니다. 협회의 출판물중에서 프랑스어는 "통치체"(Governing Body)에 대한 표준 번역이 '꼴레주 쌍뜨랄' (college central) 이며, 이것은 프랑어로 단순히 "중심체"(Central Body)를 의미합니다. 나는 계속해서 "통치체"라는 명칭이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모임처럼 들리기 때문에 다른 명칭의 사용을 개인적으로 환영한다고 말하였습니다.
클라인의 반응은 나와 다른 사람들이 지적한 문제의 요점을 신중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건을 더 심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상당히 강한 어조로. 이렇게 결론 내렸습니다. "어쨌든 "통치체"라는 명칭이 뭐가 잘못되었다는 말이오? 사실상 현재, 우리는 통치하고 있단 말이오!"
그 당시 나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현재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인지 의문스럽습니다." 그러나 칼 클라인이 문제를 제기한 방식은, 에드 던랩에게 명칭 자체 보다도 더 많은 쟁점들이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통치체는 이 사건에 대해 더 이상의 특별한 결정없이 제쳐두었습니다.
수 많은 통치체 결정의 결과를 목격하고 내가 느꼈던 불편한 감정들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교의 초기 역사를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A.D 325 년 니케아 공의회가 중요한 시점이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이 주교들의 회의는 로마 황제인 콘스탄틴에 의해 소집되어 진행되었는데, 그들이 만든 교리를 모든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동의하도록 종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특성을 전통적 요소들로 대체하는 일이 가능하였습니까? 어떻게 단지 몇 세기만에 순수한 형제애가 권위적인 교회 제도로 변형될 수 있었습니까? 그리스도께서는 직접 그리스도인 회중을 자신과 사도들과 예언자들 위에 세우셨습니다. [에베소 2:20-22.] 그런데 왜, 예수와 영감받은 그리스도인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전달한 가르침과 영에서 ―그토록 멀리 그리고 그토록 빨리― 배교가 진행되었습니까? 조직의 성서 사전, 「성서 이해를 위한 보조서」를 작업하면서 특정한 주제들을 연구해 본 결과, 일부 사실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인 모습이 아니라 단지 부분적인 것이었습니다.
본부 집필부 도서관에 있는 참조서적들의 도움으로 전체적인 그림을 맞출 수 있었습니다. 2,3세기 그리스도인 저자들의 작품을 읽어본 결과, 인상적이었던 점은, 초기 회중내에서 인간의 권위를 세우기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압박감이 되었습니다. 이 기간의 역사는, 가르침이 발전하고, 회중의 문제들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과 권력이 점진적으로 상승하였으며, 천천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권력의 집중화를 향한 움직임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내가 속해 있었던 통치체는 가르치는 권위에 대한 주장의 근거로, 예수께서 직접 그러한 중앙 집권화된 권력 구조를 세우셨다는 것을 제시합니다. 「파수대」1990년 3월 15호 (11면)에서 이렇게 기술합니다: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 전체가 집합적으로 하나님의 집안을 구성하지만, 그리스도께서 그 종 반열 중 소수의 남자를 보이는 통치체로 섬기도록 택하셨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이 기사는 계속해서 열두사도가 최초로 이러한 "통치체"를 형성하였다고 주장합니다.(12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늦어도 기원 49년까지는, 통치체가 이미 확대되어, 남아있는 사도들 외에도 예루살렘의 연로자들 여러 명을 포함하게 되었습니다. (사도 15:2) … 회중의 능동적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비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받고 모세에 의한 율법에 복종해야 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교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그 확대된 통치체를 사용하셨습니다.
기사 내용을 잘 살펴보면, 그리스도인 회중이 예루살렘과 유대의 경계를 넘어 퍼져나간 후에, 이러한 통치체는 중앙 집중화된 권력으로써 조직적으로 작용하였으며, 1세기의 모든 회중들에게 예루살렘으로부터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성경적으로나 교회사적으로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파수대」에서는 단정적으로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고 하였는데, 그것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보낸 자신의 편지에서 매우 직접적이고, 강력하게 묘사한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히 그는 예루살렘을 지상에 널리 퍼져있는 회중적 활동에 대한 신성하게 임명받은 정책적 중심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러한 그리스도의 임명받은 "통치체"가 존재했었다면, 분명히 바울은 개종한 후에 통치체와 즉각적으로 접촉하고, 그들의 인도와 지침을 순종적으로 추구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에 의해 그에게 부여된 "이방인의 사도"가 되라는 책임의 막중함을 고려해 볼 때 그러합니다.[사도 9:15; 로마 11:13.] 만약 그러한 통치체가 존재했었다면, 그는 분명히 그 성원들과 함께 자신의 사명을 조직적으로 정비하기 위해 깊은 관심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의 활동이 그리스도께서 임명하신 "통치체" 와 조화롭게 협력하지 못하거나, 그들의 지시에 순종하지 못하였다면, 심각한 "신권질서에 대한 존경심의 부족"을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사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라는 말씀을 결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를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는 대신에, 그 당시 바울이 있던 도시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다마스쿠스로 보내셨습니다. 예수께서, '아나니아'라는 이름의 다마스쿠스(다메섹) 거주자를 통해, 바울에게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아나니아는 분명히 예수살렘에 기반을 둔 "통치체" 성원 중 일부가 아니었습니다. [사도 9:1-17; 22:5-16.]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 바로 도입부 부터, 자신의 사도직과 영적 지침이 인간들을 통하거나 계승한 것이 아님을 명확히 하기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입니다. [갈라디아 1:1,10,11] 그는 자신이 개종한 후에 권력을 위한 인간적인 지위를 지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분의 아들에 관한 좋은 소식을 이방 사람들에게 선포하도록 나와 관련하여 그분의 아들을 나타내는 것을 좋게 여기셨을 때에, 나는 즉시 육과 혈로 더불어 의논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나보다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왔습니다. [갈라디아 1:16,17.]
삼년이 지난 후에야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여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분명히 베드로와 제자 야고보만을 만났다고 진술합니다. 그러나 15일 동안 머물면서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통치체"에 의해 매일 주제되는 회의와 같은 형태의 "본부 총회의"에서 어떠한 지침도 받지 않았습니다. 이 쟁점을 그가 얼마나 심각하게 고려하였는지를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나는 하느님이 보시는 데서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갈라디아 1:18-20]
따라서 그후에 바울은 자신의 근거지를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티오크(안디옥)에 두었습니다. 그가 선교 여행에 참여하였을 때에도 그를 보낸 것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티오크(안디옥) 회중이었습니다. 상대적으로 예루살렘에 근접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안티오크는 시리아의 해안 지역에 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들과 상황들 때문에 그 도시로 돌아가는데 상당한 기간이 걸렸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바와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십사 년 후에 나는 바나바와 함께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으며, 디도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계시로 말미암아 올라간 것입니다." [갈라디아 2:1,2.]
주어진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아마도 이 때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할례와 율법 준수에 관한 위원회가 열린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단지 "계시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라고 진술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이 관례적으로 또는 일상적으로 예루살렘을 모든 그리스도인 회중들에 대한 중앙 집권화된 권력의 지위로 바라보지 않았음을 알려줍니다. 즉 특정한 혹은 모든 종류의 문제들을 결정하는 기관으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그곳으로 이러한 특정한 목적의 여행을 한 것은 신성한 계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사도 행전 15장은 왜 예루살렘이 이 특정한 쟁점이 발생한 장소가 되었는지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줍니다. 이 설명 어디에도 예루살렘을 특정한 형태의 국제적인 정책 기관이 위치한 곳으로 암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로 예루살렘 자체는 골치아픈 문제들의 근원지였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섬기던 안티오크(안디옥)에서 의견 충돌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내려와서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고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전까지 안티오크의 상황은 비교적 평화로웠습니다. [사도 15:1,2,5,24.] 그리스도인 회중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유대와 그 수도인 예루살렘에서는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중에서도 율법 준수에 대한 강한 집착이 매우 강력하게 만연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심지어 이 특별한 위원회가 열린지 수년이 지난 후에도 지속되었습니다. [비교 갈라디아 2;11-14; 사도 21:15, 18-21.] 안티오크에서 문제를 일으킨 자들은 예루살렘 출신들이었습니다. 단순히 사도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자연스럽게 예루살렘이 특정한 문제들을 토론하고 조정하는 장소가 된 것입니다. 신성한 선택을 받은 사도들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비중있는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사망하고 더 이상 계승자를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환경은 곧 종말을 고할 것이었습니다. ― 즉 더 이상 아무도 사도적 은혜와 권위를 갖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세기의 상황을 고려해 볼때, 관련된 요소들은 영속적이고 지속적인 특성을 지닌것이 아니며 결국 단순하게 우리 시대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 나아가, 중요한 사실이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살아있던 시대에도, 사도 바울은 분명히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종체를 "통치체"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즉 국제적 정책 중심부인 "본부 조직"이라는 의미로 보지 않았습니다. 1975년 당시 부협회장이었던, 프레더릭 프랜즈는 자신의 길르앗 졸업식 연설가운데서, 성경을 사용하여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설명하였습니다. 「양심의 위기」에도 나오는 그의 연설문을 인용하자면, 선교 여행을 마치고 안티오크(안디옥)로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가 논쟁할 당시에 대해, 그는 이렇게 강변합니다:
"혹시, 사도들과 예루살렘 회중의 장로들로 구성된 종체는 그들을 소환하여 이렇게 말하였습니까?
'여기 보아라, 우리는 너희 두 사람이 선교 여행을 떠나 그것을 마쳤다고 들었다.
그런데도 너희는 여기 예루살렘으로 와서 우리에게 보고하지 않고 있다.
너희는 우리가 누군지 모르느냐? 우리는 예루살렘 공의회이다.
너희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직분을 인식하지 못하느냐?
만약 너희가 즉시 이곳으로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너희들에게 제명 처분을 내릴 것이다.'
이러한 설명이 가당키나 한 말입니까?
성령에 의하여 보냄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이 아니라, 안티오크(안디옥)에 있는] 회중에 보고한 일로 인해
혹시 그들이 제명 처분을 받았다면,
예루살렘에 있던 사도들의 공의회와 유대인 회중의 장로회는 자신들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 직분 위로 높이는 것입니다."
그의 연설문 전체를 통해, 주목할 만한 사실은, 다양한 현대 교회 조직들을 "통치체들"이라고 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부협회장은 결코 1세기 당시에 "통치체"가 존재했다고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는 반복적으로 "예루살렘 공의회" 혹은 "사도들의 종체"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통치체"보다 이러한 용어들이, 예루살렘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발생했던 일들을 묘사하기에는, 좀 더 현실적이고 훨씬 더 정확한 표현입니다. 사실상, 성경적 설명들을 조사해보면, 특별한 정책적 권위를 가지고 비밀 회의에 모여 결정을 내리는 소규모의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록들을 살펴보면,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회중의 장로들이 상당한 규모의 모임을 갖고 최종적으로 특정 부면에 대해 자신들의 결정이 최소한의 영향력만을 미치기를 표명합니다. 그 당시의 상황은 오늘날 브루클린 통치체에 기반을 둔 여호와의 증인 조직내의 정책적 결정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는 아주 동떨어진 것입니다. [사도 15:6,12,22. 1990년 3/15 파수대]
그 당시 부협회장의 주장은 광범위한 권위를 갖은 통치체라는 개념을 반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오늘날 다시 그러한 독특한 연설과 주장을 반복하리라고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 왜냐하면 그 주장이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현재 조직의 상황은 1975년의 조직의 정책적 대 격동기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과거 협회장이 앞서 언급한 특별한 내용의 연설을 한 분명한 목적은 (그가 종종 매우 긍정적인 용어들로 언급하였던)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로 알려진 협회와 협회장의 권위를 고취시키고, 또한 통치체 성원들이 권력을 찬탈하려는 시도가 분명히 있다고 간주하고 그들을 비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목적의 그의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앞서 1세기 상황에 대해 성경적으로 주장한 내용은 여전히 동일하게 유효합니다.
그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공의회라는 한가지 독립적인 사건이 모든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광범위한 권력을 소유한 통치체가 존재했던 증거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주장은 심지어 안티오크 회중이 예루살렘의 권고와 승인에 상관없이 행동한 것처럼, 워치 타워 협회와 협회장은 통치체의 승인과 권고에 상관없이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중 어떤 것도 협회 출판물의 가르침 혹은 그 자신의 초기 연설이나 저서들과의 일관성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후 출판물의 내용과 조직의 입장은 1975년 당시 워치타워 협회의 부 협회장(나중에 협회장이 된 프레더릭 프랜즈)의 연설에서 제공된 주장과 증거를 완전히 무시해왔습니다. 내가 심히 의심스러운 것은 대부분의 통치체 성원들은 앞서 제시된 성경적 증거의 중요성을 인식조차도 하지 못한것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부 협회장이 진정으로 지적하고자 했던 요점을 이해하지 못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는 모든 회중들과 그것을 형성하는 그리스도들인에 대한 완벽한 통제력을 지닌 통치체의 개념을 전적으로 폄하한 것입니다. 그들에 따르면, (이 책이 쓰여진 1991년 현재에) 현 협회장인 프레더릭 프랜즈는 자신의 연설에서 주장했던 입장을 명백히 보류하거나 포기한 것입니다. 이는 성경적 증거로 논증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단순히 조직이 결정한 방식과 화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분명히 변절되어 권력자들의 결정에 순응한 것이 분명합니다.
과거 당시 그들의 위상을 고려해 볼때, 만약 "통치체"가 존재하여 초기 회중안에서 정책의 중심부로써 역할을 하였다면, 예루살렘에서의 단 한번의 모임이 아니라 그 이상의 증거들이 남아서 이 사실을 지지해주어야 합니다. 나머지 성경 어디에도 이러한 사실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바울,베드로,요한,누가,유다 혹은 야고보의 모든 서신들 중에서도. 예루살렘의 사람들에 대한 어떠한 암시도 없습니다. 또한 그들이 중앙 집권화된 종체로써, 그리스도인들이 살고 있는 다른 여러 지역에 감독자를 보내어 통제력을 행사했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습니다. 바울, 바나바, 베드로 혹은 그 외 다른 사람들의 활동들이 "통치체"의 명령과 감독아래에서 이루어졌다는 어떠한 암시도 없습니다.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의 통치에 반기를 들어 예루살렘이 기원 70년에 멸망되었을 때, 그 후에는 어디에서 "통치체"로 여기지는 그리스도인들이 활동하였습니까?
거듭 말하지만, 만약 그것이 하느님의 마련이었다면, 즉 만약 그러한 중앙 집권화된 정책결정기구가 광범위하게 있는 그리스도의 회중을 인도하기 위한 그분의 도구였다면, 적어도 그것에 관한 몇가지 암시들이 있어야 합리적입니다.
예루살렘의 함락 이후의 유일한 성경적 저술물들은 명백히 사도 요한에 의한 것들입니다. 그는 분명히 거의 세기말에 그것들을 저술하였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의 멸망된 후 몇 십년이 지난 때입니다. [기원 98년. 「성경 통찰」제 2권 506,507면 참조.] 그의 편지 어디에서도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중앙 집권화된 정책 결정기구에 대한 최소한의 실마리조차 없습니다. 계시록에서, 요한의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 아시아 전역의 일곱회중에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이러한 소식들 중 어디에서도 그리스도인 회중들이 그리스도 자신이외의 다른 인도를 받고 있다는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그분이 지상의 보이는 "통치체"를 통하여 인도하고 계시다는 어떠한 표징도 없습니다.
2,3 세기 초기 그리스도인 저자들의 작품들을 구해서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중 어디에서도 수 많은 그리스도인 회중들을 감독하기 위한 중앙 집권화된 정책 기구의 존재에 대해 암시하지 않습니다. 이 기간의 역사들은 오히려 이와는 반대되는 것을 밝혀줍니다. 이러한 중앙 집권화된 권력의 기반은 사도시대 이후에 그리고 성서시대 이후에 발전한 산물임을 알려줍니다. 워치 타워가 수용한 "통치체"라는 개념의 보이는 조직적 지도력은 명백히 수 세기를 망라하여 점진적으로 중앙 집권화된 통제력의 형태로 진행되어온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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