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12/05/2024 - 22:52

Article

크레용, 장진구님 이야기...

2000년도 중반에 부천 상동에서 첫만남을 가졌던 크레용님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저를 만나러 나오는 길에도 잠바 주머니에는 작은 성경을 넣어가지고 오면서 지하철에서 읽었다던 그 영적인(!) 모습을 기억합니다. 지금도 아주 가끔 연락을 나누지만 서로 류형제, 장형제로 호칭하는 관계입니다.

우리 크레용님의 업적은 참 많지만, 그 중에서도 "양심의 위기"의 완성에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일부의 번역에 참여했을 뿐이 아니라, 책 전체의 윤문작업을 위해서 아마도 수백시간을 투자하였을 것입니다. 크레용님이 없었다면 "양심의 위기" 한글판의 출판도 없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한 개인의 아픔이지만, 탈증인 모두의 공통된 아픔의 이야기인거 같아서 소개를 해 봅니다.

//////////

(출처) 다음 <i여호와의 증인 정보카페>

장진구

1. 글을 쓰는 것 보다 말 하는것을 더 편하게 느끼기 때문에, 사실 글 쓰는 것이 좀 부담스럽습니다.

그러나 간단한 제 소개를 하는 것이 필요할 듯 싶어서 이렇게 쓰게되었습니다.

저는 1971년에 서울에서 출생했습니다.

본명은 장진구입니다.(사실 실명을 공개하는데 많이 망설였습니다. 아직 가족들이 증인이기에...)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일찌감치 여호와의 증인으로 활동하셨으며, 제 가족중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남동생이 현재 증인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시집간 여동생 한명은 공식적으로 무활동 상태이며, 저는 금년 1월에 "배교"라는 이유로 제명되었습니다.

사실 증인2세로서 별다른 고민없이 자랐겠거니 하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조숙한 탓인지 아니면 너무 고민이 많은 탓인지 어려서부터 저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던 것 같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74년, 즉 제가 4살되던 해에 서울 갈현동 회중에 다녔습니다. 그 회중은 지금의 불광동부 서부회중, 진관동 회중, 구파발 회중, 녹번동회중 등등 나중에 생긴 주변 회중의 모체가 되었던 회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5살 되던해에는 서울 신당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잠간 당시나 지금이나 협회 서울사무실이 존재하는 회관에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아버지는 매우 엄하셨고, 그래서 그런지 저는 어린 나이에도 회중집회때 졸거나 떠들거나 한눈 판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게 저는 증인자녀로 길러졌으며 성장했습니다.

제가 최초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했던 것은 국민학교(당시의 초등학교) 6학년 때였습니다. 그때 유행했던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라는 책은, 어린 저에게 무척 충격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천문학에 대한 책이었지만, 진화론에 대한 소개도 나와있었기에 그런 종류의 정보를 처음 접한 저로서는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하느님에 대한 의심을 자라게 하는데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중학교2학년에 들어서면서 생물선생님을 만나면서 그러한 의심은 확신으로 변했습니다. 그분은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하신 여선생님이셨는데, 전공은 이론물리학이었고 그 다음해에 동경대학으로 다시 유학길을 떠나셨습니다. 딱 1년을 가르치시고 떠나신 셈인데, 전공과는 무관하게 생물선생님이 부족하였기에 그분이 생물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 선생님은 흥미롭게도 수업시간 45분(내 기억이 맞다면)중에서 20분은 환경문제를 다루셨고, 한 5분에서 10분을 교과내용을 읽어주셨고, 그리고 나머지 상당시간을 자신이 가르치고 싶어하셨던 내용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 중에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우주생성과 관련한 당시의 최신이론들을 소개하던 내용이었습니다. 그 수업은 제 기억에 3명 정도만 들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잠을 자도 상관없다는 선생님의 허락때문에 다른 아이들은 잠을 자거나 다른 책을 보거나 하는 시간으로 보냈습니다. 암튼 그때의 그 충격이란... 그렇게 나는 서서히 하느님과 멀어지게 되는 사상을 정신에 형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저는 증인자녀로서 학교에서 국기에 대한 경례를 안한다거나 하는등의 증인식 규칙을 지켰는데, 그 이유는 일종의 "의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회중성원들을 속이고 싶지 않았고, 부모님을 실망시켜드리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버지와 하는 성서연구(사실상 출판물 문답)때도 이러한 새로운 확신을 말씀드리고 싶어서 그러한 견해를 말씀드리면, 불같은 아버지의 성격때문에 뺨을 맞기도 했고 상이 날아가기도 했고 책을 던지셔서 그것으로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자주 반복되다 보니까, 저는 일종의 타협안을 생각해 냈는데, 이를테면 아버지께서 서적(당시에는 지상낙원책)아래 나오는 인쇄된 질문을 하시면 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성서의 말씀에 의하면 .....이러이러 합니다."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아니 그게 아니라, 네 생각을 말해봐라."

저는, "성서가 만약 맞다면,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틀린 대답은 아니지만, 너무나 삐딱한 대답이었기에 아버지 마음에 들리가 없었고 그래서 연구는 항상 무거운 분위기에 고문당하는 기분으로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한계를 느끼셨는지 회중에서 당시에 아주 열심을 갖고 활동하던 이**형제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 형은 아버지가 사회하셔서 침례까지 받게한 사람이었기에, 아버지와 무척 친하게 지내던 형이었습니다. 저는 새로운 분위기에서 연구를 하면서 그 형의 열심과 정성때문에, 너무나 미안해진 나머지 제가 하고싶은 질문을 제대로 못하고 마지못해 원하는 대답을 해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발전?하는 내 모습을 보고 그 형은 흐뭇해 했죠.

저는 사실 그 무렵부터 몸부림을 쳤는데, 사실 하느님이 존재하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아니라면, 그것을 그냥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창조]책을 7번정도 읽었으며, [사람은 진화되었는가 혹은 창조되었는가?]책을 읽었습니다. 그 이외에도 창조를 설명한 다른 출판물에 나오는 기사들도 찾아서 조사했습니다. 어린 나이에 그러한 일은 너무 힘들기도 했지만, 평생을 바쳐야 할 중요한 선택이 될 것이기에 정말 고민하면서 그러한 조사를 나름대로 했고, 결론은.... "하느님은 계실 가능성이 많다" 였습니다. ^^

쓰다보니 밤이 깊었네요. 나머지는 다음에 쓰겠습니다.

2. 제가 당시에 잘 납득이 가지 않았던 논리는 이것이었습니다.

[생명- 그 기원은 무엇인가? 진화인가 창조인가?]책에 나오는 논리중 하나는 생명이 우연히 생길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설사 그것이 백만분의 일, 아니 수백억분의 일, 아니 그 이상의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0이 아닌한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었죠.

이를테면 이런 반박을 했습니다.

"내가 볼펜을 공중에 던지면 분명히 그 볼펜은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런데 그 볼펜을 던지기 전에, 그 장소에 정확히 그 모양으로 떨어질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것은 거의 0에 가까울 정도로 희박한 가능성이다. 그런데도 그 볼펜은 그 자리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가? 있을 수 없는 현실이 발생하고 만 것이므로, 생명의 출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생각해야 한다."

대강 이런 정도의 논리를 나름대로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이 논리가 얼마나 허점이 있는지는 나중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암튼 저는 성경통독이나 기도를 통해서 보다는 그런 나름의 논리를 통해서 하느님을 더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록 성경이나 하느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은 했지만, 증인식으로 교육받은 도덕관은 저를 온통 지배했습니다. 또한 회중에서 대답할때는 내가 확신하지도 않은 결론을 상당히 설득력있게 해설하는 방법도 터득하고 있었습니다. 일종의 위선이었지만, 저는 그것이 부모님께 좋은 일을 하는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랜 연구끝에 내린 결론은, 성서가 맞는지 틀린지 아직은 확신할 수 없지만 맞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고 만약 성서가 맞다면 참 종교는 여호와의 증인일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삼위일체, 영혼불멸과 같은 굵직굵직한 교리에서 나름대로 설득력있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던 제게, 인용된 성구는 협회의 모든 논리는 성경적 근거가 있을것이라는 막연한 환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저는 하느님을 100퍼센트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서서히 믿음이 생기기 시작했고(사실 믿음을 퍼센트로 말하는것 자체가 모순이지만) 믿음이 약화되었다가 강화되었다가 하는 경험을 반복했습니다.

나름대로 똑똑한 편이었다고 생각했던 저는, 학구적인 호기심이 상당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에는 원호의 중심을 구하는 방식을 스스로 만들기도 했고,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거대한 폭포수에서는 물보라가 생기는데 비해서, 단지 축소했을 뿐인 모형 정원에서는 왜 물보라가 생기지 않는지에 대해서는 분자의 결합력과 중력과의 관계 때문일 거라는 추측을 했었고. 당시 나이로서는 이런 자신이 천재로 여겨질 정도였습니다. 너무 우습지만요..^^

그러던 제가 학업성적이 뚝 떨어진 계기가 생겼는데, 중1때에 학교폭력에 시달렸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 제 생각으로는 어떠한 주먹질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니 누가 때리면 맞을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이 불량스런 몇몇 아이들에게는 좋은 먹이감으로 보이게 만들었던 모양입니다.

아주 어린시절에 싸우다가 이기고 들어오면 부모님은 저를 그 아이와 그 아이 엄마가 보는 앞에서 때렸습니다. 그리고는 정중히 사과하셨습니다. 내가 보기에는 상대 아이가 잘못한 것인데도 부모님은 그렇게 하셨는데, 증인은 폭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주입시키기 위해서였던것 같습니다. 너무 불합리하게 느껴졌지만, 나는 그것이 하느님의 방식이라고 생각했고 하느님을 의심하면서도 그런 도덕률은 지키는 심리적 압박속에 시달렸습니다.

많은 기도를 했지만, 그 기도는 제가 원하던 방식으로 응답이 오지는 않았고 저는 무척 실망했습니다.

그때부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괴로운 학교생활이 시작되었는데, 중2때쯤에는 거기에 한술 더떠서 "증인들은 대학에 갈 수 없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습니다.

당시 증인들은 대학교육을 가지 못하도록 권고하고 있었고, 그것은 거의 불문률과도 같아서 만약 어떤 장로의 자녀가 대학진학을 하면 그 장로는 권고사임 즉 사실상 해임을 당하게 되어있는 분위기였습니다. 우리 어머니 기억으로는, 어떤 대회에서는 연설에서 "자녀를 대학에 보내는 것은 사탄에게 자녀를 제물로 바치는 것과 같다."는 말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실상의 금지였습니다.

과학을 하는게 꿈이었던 저로서는 큰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핑계로 공부하고 싶은 생각은 서서히 접게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당시에 인근 회중에서 중립을 지키던 두명의 형제중 한 명이 맞아서 죽게되는 일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무렵이었는지 그 전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듣게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심한 공포감이 생겼고, 단지 부모님을 위해서 이 종교를 실천하는 것은 너무 무리가 있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이런 저런 고민을 하면서 사춘기도 맞이했고, 그러나 큰 탈 없이 그 시절을 넘겼습니다.

고 2때 여름 지역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는데, 그때 심정은 파스칼이 말했던 말과 같았습니다.

"종교는 도박이다."

저는 증인생활을 하면서 진리에 대해 더 알아보겠다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느님께 헌신도 안하고 침례를 받았고, 헌신은 그 후 나중에 했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제가 하느님을 뚜렷이 인식하게 된 것은 중립기간중에 있었던 기도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다음에 또 이야기 하겠습니다.

3. 제가 초등학교 시절부터 쭉 있었던 회중은 서울 진관동 회중이었습니다.

그곳의 분위기는 인간적인 정이흐르는 시골 동네같은 분위기여서, 저는 정서적으로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어느 회중에나 있듯이 그곳도 사람들간의 말질과 질투등이 존재했고, 장로들간에는 알력도 존재했던 것 같습니다. 어린 나이여서 저는 그런것들에 거의 영향을 받지는 않았는데, 저를 사회해주던 형들이 좋은 형들이어서 그랬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분위기도 있었는데, 이를테면 제가 고등학교에 진학할때 회중 자매님들은 제 어머니께 "지금 때가 어느때인데 고등학교를 보내? 중학교만 졸업시키고 파이오니아를 시켜야지!"

보통 이런 식으로 어머니께 공격?해 오셨습니다. 저희 어머니는 "내일 모레 아마겟돈이 오더라도 지금 할 것은 해야한다."라고 대답하셧다고 합니다. ^^ 당시에 파이오니아셨던 열심있는 어머니도 그런면에서는 주변의 분위기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계셔서 다행히 저는 고등학교를 진학했고, 당시에 있었던 교련문제도 선생님을 아주 아주 잘 만나서 문제없이 해결되었습니다.

원래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하려던 것은 아닌데, 이야기 하다가 보니 엉뚱하게 흘러가네요.

다시 침례받았던 고2때 시절. 저는 온화하고 순종적인 아이였지만, 또한 고집도 있어서 회중의 한 장로 형제와 언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회관에 구두를 신고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대답은 "저는 운동화를 신는것이 단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학생이고, 이 나라에서는 학생은 운동화를 신는게 보편적입니다. 우리학교는 구두를 신으면 선생님한테 맞습니다." 그랬더니,

그 장로의 말씀은 "신권조직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는거야. 그리고 학교에 갔다가 집회에 나올때는 구두로 갈아신으면 되지."..... 제 고집은 이럴때 이상하게도 꺾이지를 않아서, 저는 계속 운동화를 고집했고 그것은 그분과 약간의 긴장감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회견때도, 그리고 연단에서 실연을 할 때에도, 연설을 할 때에도 티셔츠에 잠바차림으로 올라갔습니다. 가난했던 우리집에서 양복은 너무나 사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또 한번은 이런일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방학때면 보조파이오니아를 하곤 했는데, 시간을 채울 수 없어서 지하철을 타면서 충무로역이나 종로3가역등에서 봉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서울역에서도 봉사를 했는데, 그때도 역시 운동화에 일반 학생들처럼 입고 갔습니다.(당시 울 학교는 교복이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곳을 인도하는 형제가 저에게 "봉사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순간 화가나면서 "왜 할 수 없죠?"라고 물었는데, 대답은 "옷차림이 합당치 않습니다."였습니다.

저는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고, 수년간 서울역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아~... 또 방향이 엉뚱하게 계속 어린시절 얘기네요.

이제 중립시절부터 이야기 드립니다.

중립때 괴로웠던 것은 폭력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제가 온전한 확신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당시에는 제가 입수할 수 있었던 출판물중에서 "중립"이란 내용이 나오는 출판물이 전혀 없었습니다. 사실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제가 못 찾았던 거죠.

아주 오래전에 발간되었던 [모든 사물을 확인하고 훌륭한 것을 굳게 잡으십시오.]라는 책에 중립에 대한 간단한 항목이 나오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출판물에도 없었고, 심지어 추리책에서도 중립항목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원래 영문에는 "중립"이라는 항목이 있었지만 한국어로 발행하면서 그 항목만 삭제했다고 하더군요. 최근에 개정된 추리책에는 다시 중립항목이 들어가지만....

그래서 사실, 여호와의 증인의 아주 중요한 교리임에도 불구하고 충분한 정보를 입수할 수 없었는데 협회로 질의서를 보내는 것도 쉽지가 않았습니다.

당시 연구사회자였던 형은 말하기를, 그런 내용은 출판물로 이야기 할 수도 없고 편지를 보내봤자 대답해 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게 중립이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그것은 전적으로 개인의 양심문제이며 협회의 지시는 아니라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순간 납득이 가질 않아서 여러차례 질문했는데, 언제나 설명은 "네가 성서로 훈련받은 양심으로 그렇게 결정하는 것이지 협회의 교육이나 집회에서 군복무를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아니다. 만약 누군가 진구한테 물어보면 그렇게 대답해야해. 알았지?"

저는 이해가 안 갔지만, 그것이 조직의 마련이라니 따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생각한 것은 "왜 저렇게 거짓말이나 마찬가지인 말을 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걸까?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받더라도, 그리고 조직이 설사 해체되어 지하활동을 하더라도 당당하게 그것이 우리의 교리임을 말해서는 안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한가지는 제 생각에 증인들의 교리인 중립을 온전히 지키려면(그 논리대로라면), 군사조직에 속해서는 안 되었는데. 그렇게 하려면 군 입대자체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분위기는 거의 모든 형제들이 군입대를 하고서 그곳에서 집총거부를 하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중립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협회의 논리대로 이세상의 정치 군사 조직에 가담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라면, 집총거부가 아니라 입대를 거부해야하는게 맞을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또 의문이 든 것은 만약 이사야2:4을 근거로 "전쟁연습"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방위산업체에는 근무할 수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드는 의문은 "이것은 그렇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법은 아니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억눌렀습니다. 아무튼 협회는 그런 방위산업체 근무도 금했고 저는 납득은 안 가지만 대세를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의 생각을 회중 주임감독자에게 찾아가서 자세히 전달하였고 "저는 입대를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유**형제) "글쎄~~ 다들 가는데, 장형제도 그냥 들어가는게 낫지 않아? 난 잘 모르겠는데. 협회는 그걸 원할거야. 기피보다는..."

또한 아버지께서도 "너 혼자 튀려고 하지 말아라. 전체적인 대세를 따라라."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저는 이것이야말로 개인의 양심문제인데, 어떻게 협회는 이런 부분을 세세히 정해놓은 것일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것도 협회의 보이지 않는 지침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지도였습니다.

협회는 그것이 전적으로 개인의 양심문제라고 말하면서도 사실은 세부적인 부분을 다 정해놓고 장로들에게 지침을 내렸습니다. 저는 이러한 인간적인 규칙때문에, 정말로 성서로 훈련받은 양심이 제대로 발휘되는것이 침해당하고 있다고 느꼈지만 현실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결국 입대를 했고 또다른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쓰다보니 또 길어졌네요. 별볼일 없는 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쓰니가 괜히 죄송한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궁금해 하는 분들이 그동안 있어서...나중에 또 쓰겠습니다.

4. 원래 겁이 많던 제가 드디어 입대를 앞두게 되었습니다.

입대가 아닌, 입대거부의 입장을 취하려던 저의 계획은 주변의 압력?으로 무산되었기에...

5월에 들어가던 날.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회중의 한 자매님 한 분이 배웅을 해 주셨습니다.

306보충대, 2군지사, 3군 헌병대 영창까지 어느정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입대 첫날에 그 수많은 청년들 중에서 섞여 있을 때. "여호와의 증인 손들어."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제 기억에 천명 정도 같은데, 그 중에 저 외에 한 명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는 증인2세지만 거의 활동을 안하다가 급하게 침례받고 들어왔답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까 "장 형제가 다 알아서 결정하고 나에게 말해주라." 하는 식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문제에서 각자의 양심이 다르기에 알아서 해 주기를 바랬는데, 본의아니게 지시?하는 사람이 되게 되었습니다.

처음 맞닥뜨린건 군복문제, 제 생각으로는 군복을 입는건 군대에 군인으로 속하는 것이기에 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단지 옷으로 생각하고 입을 수는 있다고 보았지만, 사람들은 그 옷을 입는순간 군복무를 받아들이는구나 하고 생각할 것이라 여겨서 그것을 거부했습니다.

옆에 있던 그 형제도 나를 따라서 거부했습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증인들은 군복을 받아들였다고 들었기에 저는 그 형제가 나를 따라서 행동하는게 부담스러웠습니다. 마치 내가 규칙을 정하는 느낌이 들어서였습니다.

나는 "사람들과 천사들 앞에 구경거리"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306보충대에서는 군복을 입지 않는건 어떻게 넘어갔지만, 머리는 깎였습니다.

저는 무모하게도 민간인으로 대우해줄것을 요청했는데, 간단히 묵살당했습니다. ^^

며칠 후 2군지사로 넘어갔을 때에, 다시 군복을 입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는 또다시 거부했고, 구타가 몇십분간 있고 난 후에 "도대체 그냥 옷을 왜 안입으려느냐?"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군복이기 때문에 안 입습니다. 저는 푸른색 옷이 싫은게 아니라, 군복을 입는것이 신분을 의미하기에 입지 않습니다. 만약 저것이 죄수복이라는 말을 하셨다면 저는 입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군인은 "이건 단지 죄수복이다."라고 해주었고. 짜고치는 게임처럼 저는 그것을 그제서야 입었습니다. 이런 종류의 문제는 셀 수 없이 많이 발생했는데, 그 동안 체득되었던 마음의 소리와 증인식 규칙의 소리가 뒤엉켜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한동안 순조로웠습니다. 우리가 많은 형제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3군 헌병대 군영창에 들어갔을 때, 수십명의 수감자들 중에 몇 명은 증인임을 알았습니다.

그곳에서는 화장실도 맘대로 못가고, 고개도 함부로 못 돌리고, 말도 할 수 없었으며 그 외에 각종 규칙이 있었고, 수시로 고통스러운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료 증인들이 있었기에 마음에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때부터 '형제들은 통일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무언의 압력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상황은 드디어 육군교도소로 갔을 때 가장 심해졌습니다.

장호원에 있는 육군교도소는 과거에 남한산성에 있었던 육군교도소가 이전한 것입니다.

과거에는 육각형 모양이라서 그곳을 "육각"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91년 당시에는 "희망"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체육복을 죄수복으로 입고 있었습니다.

전국에서 몰려오는 그곳에는 당시에 저와 같은 영창에서 가게된 12명의 증인들이 한꺼번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다른 지역에서 들어온 증인 형제들이 있었습니다.

처음에 맞닥뜨린 문제는 "식사에 대한 감사의 묵념"이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것을 "연합신앙"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방인"들과 함께 기도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이런 문제에는 당시 어렸고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상당히 헷갈렸습니다.

밖에서 봉사의 종이나 파이오니아신분을 지니고 들어온 형제들이 "종체"라는 조직을 구성해서 다른 형제들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항상 일관성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많은 경우 자신들의 추측을 다른 형제들에게 강요하는 형식도 띄게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거수경례를 해야 할 것인가 말아야 할 것인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아무 문제없게 생각했습니다. 다른 증인들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지냈습니다.

다만 "충성"이라는 구호가 문제라고 여겼기에 그것을 거부하면서 엄청나게 맞기도 했지만, 그럭저럭 지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종체"가 바뀌면서 그 문제가 다시 불거졌습니다.

그러나 심각했던 것은 "아침 기원문"과 "저녁 기원문"이라는 일종의 암기문이 문제였는데, 점호 시간에 각 방에서는 이것을 큰 소리로 외워야 했습니다. 외우는게 무엇이 문제겠습니까마는 그것은 일종의 기도문이었기에 우리는 그것을 "중언부언 하지 말라"는 말씀을 어긴것으로 보기도 했고, 그 내용중에는 문제가 있어보이는 문구도 있었기에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형제들은 그걸 했고, 종체는 그 형제들에게 압력을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제 머리는 아득해졌습니다. 증인들은 세상을 향해서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게 해달라고 요구하는 입장이었습니다. 제 생각에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양심기능을 각자가 선택해야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종체는 그것을 결정했고, 당시 한 방의 사회자였던 저는 제 방에 속한 형제들에게 그 지침을 내려야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동일한 문제가 밖에 나가서 회중생활할 때 장로들 차원에서도 있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것은 사실상 다른 형제의 양심을 침해하는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것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한 형제의 입장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비겁함이 아니라, 판단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문제는 이 외에도 무척 많았지만,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려워서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그것은 외부의 구타나 얼차려보다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내부의 모순이었기 때문이죠.

또다시 이런 "종체의 인도" 혹은 "신권적인 인도?"의 모순점을 느낀 것은 민간 교도소인 대전으로 이감된 직후부터 다시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무렵에 저는 열열히 하느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간단히 쓰려던 것이 또 마무리를 못하고 넘어가네요. 죄송~~~^^

5. 제가 아직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회중내에서 활동하던 당시에 협회에 보냈던 편지내용입니다.

당시에는 워치타워 조직을 상당부분 신뢰하고 있었지만, 때때로 출판물에서 눈에 띈 모순들이 저의 눈에 있던 비늘을 서서히 벗겨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내용은 당시 3월 1일호 파수대 기사에 나오는 "슬기로운 처녀의 비유"의 설명이 1976년에 발행된 [천년왕국]책에 나오는 역사와 명백히 모순된 내용이어서 그 점을 지적한 것입니다.

답장의 요지는 우리는 잠언4:18에서 "점점 밝아져 마침내 날이 굳게 선다."고 한 것처럼 교리의 변경이 있었다는 내용뿐이었습니다. 차후에 전문을 올리겠습니다.(협회의 답장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어디에다가 두었는지 안 보입니다.)

========== 편지 전문 =========

친애하는 형제들.

안녕하십니까? 여름지역대회가 다가오고 있는 바쁜 시기에도 열심히 수고하시는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와 인사를 드립니다.

저는 서울 응암북부회중과 연합하고 있는 장진구 형제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최근에 협회 출판물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생겨서 질문을 이렇게 드립니다.

얼마 전 2004년 3월 1일호 파수대 에서는 연구기사 ['충실한 종'이 시험을 통과하다]를 배웠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 대하여 다룬 기사였습니다.

그 내용 중에는 14면 6항에서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슬기로운 처녀와 어리석은 처녀

6 예수께서는 “그 악한 종”에 대해 말씀하신 뒤에,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일부는 충실하고 슬기로운 반면 일부는 그렇지 않은 이유를 보여 주는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슬기로움에 관해 그분은 이러한 예를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하늘 왕국은 자기 등불을 가지고 신랑을 맞이하러 나간 열 처녀와 같이 될 것입니다. 그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등불은 가지고 있었으나 기름은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들은 등불과 함께 그릇에 기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태 25:1-4) 열 처녀는 1914년 이전의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들은 신랑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곧 나타나실 것이라고연대를 계산해 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나라들의 지정된 때”가 1914년에 끝날 것이라고 담대하게 전파하면서 신랑을 맞이하러 ‘나갔습니다.’―누가 21:24.

7 그들의 계산은 정확했습니다. 나라들의 지정된 때는 실제로 1914년에 끝났으며, 그리스도 예수 휘하의 하느님의 왕국이 다스리는 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생략)...

8 그런데 1919년에 예기치 않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기록은 이러합니다. "한밤중에 '자, 신랑이다! 맞이하러 나오너라'하는 외침이 났습니다. 그때에 그 처녀들은 모두 일어나 자기 등불을 준비하였습니다." (마태25:6,7) ...생략)...

위의 내용에 의하면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은 1914년 이전부터 예수그리스도께서 곧 나타나실 것이라고 연대를 계산하였으며, 그들의 계산은 정확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1976년에 발행된(영문73년) [하나님의 천년 왕국은 다가왔다]책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책 192면에서는 48항에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릇된 이해의 시정

48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의 편집겸 발행인이 천적 신랑의 “임재” 혹은 ‘파로우시아’가 기원 1874년에 시작하였다고 계산한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여호와 하나님이 첫 인간을 창조하신 해가 기원전 4128년이라고 ‘러셀’과 그의 동료들은 계산하였읍니다. 그것은 지상에 인간이 존재한지 6,000년이 기원 1872년에 끝나는 것을 의미하였읍니다. 이러한 계산이 1906년 7월 1일로 시작하여 「시온의 파수대와 그리스도의 임재의 전령」 제 1면에 발표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관습은 1928년 9월 15일호까지 계속되어 내려왔읍니다. 예를 들면, 그러한 것을 알리는 첫 호에는 문제의 연대가 “주후 1906년 7월 1일―세계 기원 6034년”으로 게재되었읍니다. 마지막 호에는 “세계 기원 6056년―1928년 9월 15일”로 되었읍니다. “세계 기원” 연대는 통용 기원전 4128년으로 계산되었읍니다.

위의 내용은 초창기의 증인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임재를 1874년에 시작하신 것으로 계산하였다는 사실이 나옵니다. 그리고 같은 책 195면 55항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55 1943년에 ‘왙취 타워 성서 책자 협회’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책(영문)을 발행하였읍니다. 그 책은 제 11장 “때의 계산”에서, 사사들의 기간에 100년을 첨가하지 않고 사도행전 13:20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믿을 만한 본문에 따랐으며, ‘히브리’어 성경의 정식으로 또박 또박 쓴 수자를 받아들였읍니다. 그 결과, 인간 존재의 육천년의 끝은 1970년대로 옮겨졌읍니다. 물론 이와 함께, 기원 1874년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돌아오심과 그의 보이지 않는 임재 혹은 ‘파로우시아’가 시작된 해라는 생각은 제거되었읍니다. 그러므로, ‘사단’ 마귀가 결박되어 무저갱에 감금되고 144,000명의 공동 후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영광 가운데 통치하는 것으로 시작될 천년기는 아직 미래사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파로우시아’(임재)는 어떠합니까? 이상에 언급한 책 324면은 단정적으로 “왕의 임재 즉 ‘파로우시아’는 1914년에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1949년 7월 15일호 「파수대」(215면, 22항)는 이렇게 기술하였읍니다: “··· 인자이신 메시야는 주후 1914년에 왕국의 권능을 잡으셨으며, ··· 이것이 그의 두번째 오심과 그의 두번째 ‘파로우시아’ 즉 임재의 시작을 이룬다.”

이상의 내용을 보면 1914년에 예수께서 임재 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1914년이 훨씬 지난 뒤의 일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파수대 2004년 3월1일호14면에 나오는 [열 처녀는 1914년 이전의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이들은 신랑인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제 곧 나타나실 것이라고 연대를 계산해 냈습니다. ... 그들의 계산은 정확했습니다.]라는 문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제 질문을 요약하자면 이러합니다.

첫 번째는, 위에 언급한 파수대기사 6,7항에서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제 곧 나타나실 것이라고 연대를 계산하였습니다."라는 문장에서 "곧 나타나실 것"이라는 말은 "임재"즉 "파루시아"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까? 만약 아니라면, 그러한 문장을 사용한 이유는 무엇인지요?

두 번째는, 1914년 이전의 성경연구생들은 1874년에 예수께서 임재하셨음을 믿고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연구생들이 예수께서 1914년에 임재하셨음을 분별하게 된 시기는 정확히 언제인지요? 같은 파수대 8항에 의하면 "1914년에 '자, 신랑이다! 맞이하러 나오너라'하는 외침이 났다"고 합니다.

이 문장이 암시하는 것은 1914년에 예수께서 임재하셨음을 1914년에 알았다는 말씀인지요? 아니면 1943년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책이 발표되었을 때 알았나요? 아니면, 또 다른 연대에 알게 되었나요? 정확히 1914년에 예수께서 임재하셨음을 분별한 시기가 언제인지 궁금합니다.

간단한 질문을 좀 장황하게 늘어놓아서 죄송합니다.

성서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늘 수고하시는 본부와 지부에 계시는 형제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다가오는 모든 영적 활동과 계획에 여호와의 축복이 함께 하시길 바라면서, 따뜻한 인사를 드립니다. 동료 종인 장진구 형제 드림.

========================

6. (2013년 4월 15일 수정: 편지 원문에 기록되어 있는 실명을 그대로 공개되어 있던 것을 고칩니다.

해당 사법위원회에서 일했던 분들의 자녀들도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또한 세월이 꽤 지났기 때문에 당사자분들과 가족들에게 지나친 심적 부담이 될 것 같아서 실명 전체를 공개하는 대신 수정하여 한 글자를 *로 대체 표기했습니다.)

앞서 2004년의 편지내용은 사실 단순한 질문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저에게 있어서는 심각한 고민거리였고 그것은 통치체에 대한 나의 신뢰 및 그동안 받아왔던 "영적 양식"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저는 그 이전부터 때때로 이러한 심각한 회의감에 빠져든 때가 있었는데, 그 때마다 들어왔던 것은 "좀 더 개인연구에 몰두하고, 봉사에 충실하라"는 교훈이었습니다.

나름대로 개인연구에 몰두하려고 하면 할수록 의문이 풀리기보다는 더더욱 의문에 빠져들었고, 급기야 한때 확신했던 성서와 하느님에 대한 의심까지 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실 성서자체의 모순때문이라기 보다는 조직의 가르침과 조직의 역사 그리고 성서의 내용과의 조화가 안 될때의 몸부림이었다고 이제는 생각합니다.

저는 개인연구를 하다가, 이 조직이 혹시 성서 마태24장에 예언된 "거짓예언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의 심정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혼란스럽고 두렵고 슬픈것이었습니다.

저는 많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누구에게도 허심탄회하게 상의를 할 수가 없었기에 이것은 정말 외로운 싸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아무하고도 상의할 수 없엇던 것은 아닙니다. 몇 몇 관계를 가져왔던 일부 사람들과 아주 조금씩은 이야기도 해보고 모색도 해보았지만, 나의 속 전체를 내보일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당시에 10월 몇 째주인가? 그 무렵에 해당하는 주간성서읽기의 주요점을 제가 다루도록 임명받았습니다.(신권전도학교에서 하게 되어있는 이 연설 임명은 일찌감치 받아놓고 있었음.)

그 범위중에는 신명기 18장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아.... 이것을 어떻게 해야하나?"

저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신명기 18:20-22에는 "거짓예언자를 식별하는 방법"에 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당시까지만 해도, 일부 의문이 들더라도 조직의 견해에 나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연설에서 개인적인 생각을 집어넣으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부분은 넘어가려고 하자니 중요한 부분이라서 건너뛰면 안될듯 싶고, 다루자니 조직의 견해와는 충돌하는 내용을 짚어야겠고....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도를 하였습니다.

"이런 문제만큼은 거짓말을 하지 말자!!! 연설을 하려면 제대로 다루고, 그렇지 않을것 같으면 연설을 포기하자!!"

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더 기도하면서 성서도 읽고, 협회출판물도 읽어보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이제 결론을 내려야 했습니다.

저는 MTS("봉사훈련학교"라고 불리우는, 독신 장로와 봉사의종들을 위한 훈련 프로그램)를 졸업하고, 필요한 구역에 가서 봉사하고 있던 어떤 형에게 전화를 걸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적어도 워치타워 조직에서 자랑하는 교육프로그램을 이수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연대문제에 자신이 있다고 하는 형이니까 어쩌면 나의 고민을 해결해 줄 지 몰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약간의 기대도 했던 것입니다.

2004년10월10일 날자로 되어있는 저의 메모수첩(때때로 일기장을 겸한 나의 플래너)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그날 그 '어떤 형'과 통화를 하고 나서 적은 모양입니다.

(실명을 공개할 수 없어서 WJ라는 이니셜로 처리하였습니다.)

=====================

저녁에 WJ형과 전화 통화.

역시 내가 대화를 이끌어가는 부면에서 아직도 개선할 문제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이미 WJ형은 어떤 틀에 단단히 고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게 어떤 몇 마디 말을 한다고 해서 내가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또한 "긍정적"인 방향에서 결론을 내려줄 것을 (내게) 기대했다.

몇 가지 가지고 전체를 판단하지 말아줄 것 역시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문제에 대해 정면에서 조사하려거나 숙고해보려는 생각은 없는 듯 했다. 이미 필요없다고 결론내린탓도 있겠지만,

바쁜 이유도 있으며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영향을 받고 싶지 않다는 것일수도 있다.

나는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이 존재한다는 인식을 내비쳤는데, 그것은 건전한 두려움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종류의 두려움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다.

결론을 내리기 위해서 전화한 것은 아니었지만, WJ 형과의 대화는 내게 시사하는 점이 분명히 있다.

그것을 푸는 것은 앞으로의 숙제이다.

진실을 알려는 노력과 그것을 알리려는 노력이 나쁜것일까?

그렇지는 않다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고 기다리기를 사람들은 원한다.

그것이 정말 하느님을 기다리는 태도일까?

관심을 갖고 있는 부분을 맡겨두는 것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부분에 무언가를 하면서 그렇게 하는 것은 조화될 수 있다.

흔히하는 오해는, 이미 영향력안에 있는 것도 그냥 방치하면서 하느님께 올바로 맡겼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물을 제대로 보거나 다루는 방법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맡김과 기다림은 적어도 그런것은 아닐 것이다.

=====================

당시에 내가 그 형과 무슨 대화를 길게 했는지 구체적인 점은 기억이 안납니다.

다만 초창기 여호와의 증인 역사에서 1874년을 예수그리스도의 임재로 진지하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는 점, "그것은 혹시 마태24:23-26에서 경고한 것을 성취한 것은 아닐까?"하는 의혹과 함께

이 조직은 회개한 적이 없지 않나? 정말 그렇게만 한다면 아무 고민없이 이 조직과 함께 갈수 있을텐데 ... 하는 그런 내용. 그리고 1914년의 근거가 되는 기원전 607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한 대화였던 것 같습니다.

나는 더욱 진지한 기도와 눈물로 시간을 보낸후에 결론을 내렸습니다.

"당분간 집회를 중단하자!! 통치체로부터의 영향력을 차단한 후에 기도하고 묵상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하고서, 혹시 내 판단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때 다시 연합하여 하느님을 섬긴다면 오히려 다행스럽겠다는 생각도 하였습니다.

그 이전에, 나는 "거짓예언자" 혹은 "거짓선지자"라는 항목이 들어간 내용의 워치타워 출판물을 모두 조사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색인을 동원하여 내가 구할 수 있는 모든 출판물을 다 조사해 보았는데도 불구하고,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 나는 협회의 주장 즉 "우리는 때때로 잘못된 연대에 대한 기대를 가진 적은 있지만, 거짓 예언을 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감받았다는 주장을 하지도 않으며 예언을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라는 말 때문에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저의 기도는 응답이 된 듯 싶었습니다.

워치타워 출판물 중에는 '학개와 스가랴의 예언의 고찰'이라는 부제목을 단 책이 한 권 있었습니다.

그 책의 제목은 [신권통치에 의하여 인류에게 회복될 낙원]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에는 제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나옵니다.

"하나님께 대한 충성은 혈연을 초월한다"라는 제목으로 351면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

14 “죄와 더러움을 씻”도록 “샘”이 열린 “그 날”은 또한 하나님께 대한 사람의 충성의 정도를 시험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기원전 537년에 ‘바벨론’에서 회복된 남은자들은 이것에 대한 경고를 미리 받았읍니다. 주권자이신 주 하나님께서는 그의 숭배자들의 그 분께 대한 충성이 어느 정도라야 하며 어느 정도가 될 것인지를 설명하여 예언자 ‘스가랴’에게 이렇게 계속 말씀하셨읍니다.

15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할 이라. 사람이 오히려 예언할 것 같으면 그 낳은 부모가 그에게 이르기를 네가 여호와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말을 하니 살지 못하리라 하고 낳은 부모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리라.”―스가랴 13:2, 3. (밑줄과 굵은강조는 크레용)

======================

저는 이 문장과 함께 이어지는 내용에서 또 한번 뒤통수를 맞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

16 만군의 여호와께서는 여기서 기원 1919년 이후 우리 시대와 관련하여 영적 ‘이스라엘’인의 회복된 남은자들의 영적 토지에 관하여 말씀하고 계셨읍니다. 자신에 대한 전적 헌신을 요구하시는 이 하나님께서 “우상의 이름”을 그들과 그와의 관계의 “땅”에서 없애셨으므로 그들은 이제 바다에서 나온 “짐승”과 그 짐승의 “우상”을 숭배하기를 거절합니다. 정치 기구에 대한 성서의 상징을 사용하지 않고 평범한 말로 한다면, 영적 ‘이스라엘’인들은 전세계적으로 전체로서 정치 국가와 국제 연맹과 그의 후신인 국제 연합을 숭배하기를 거절합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짐승의 표”를 받는 데 대한 하나님의 형벌을 피합니다. (계시 13:1-18; 14:9, 10) 그들은 “‘시온’ 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으며 그들은 “하늘에 기록”되어 있으며 그들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읍니다. (히브리 12:22, 23; 빌립보 3:20) 그러므로 그들은 지적인 국가주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국가주의적인 우상에 숭배의 행동이나 태도를 나타내지 않습니다. 충성스러운 영적 ‘이스라엘’인들은 참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며, 그에게 진심에서 나오는 온전한 충절을 바칩니다.

17 여호와께서는 또한 회복된 남은자들의 영적 토지에서 거짓 예언자들과 “더러운 사귀를” 없애셨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현 “사물의 제도의 결말”에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고 미리 경고하셨읍니다. (마태 24:3, 4, 24, 25) 사도 ‘요한’은 이렇게 경고하였읍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요한 1서 4:1) 따라서 영적 ‘이스라엘’인의 회복된 남은자들은 지상에 있는 그들의 영적 토지를 침입하는 혹은 그 가운데서 일어나는 거짓 선지자를 경계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밑줄및 굵은 글씨등의 강조는 크레용)

========================

저는 이미 러셀이 1874년부터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셨다"라고 주장한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1914년은 임재의 끝으로서 그때 이후로 천년기를 기대하다가 실패한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워치타워 조직이 국제연합에 약 10년간 가입했다가 탈퇴한 사실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지금처럼 "1914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왕국의 왕으로서 통치를 시작하셨고, 보이지 않게 임재를 시작하여 원수 가운데서 다스리기 시작한 해이다."라는 가르침을 온전히 하기 시작한 해가 1943년과 1944년에 걸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책을 통해서 였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1914년의 임재설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아주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는 역사였습니다.

예수께서 보이지 않게 "임재하셨던" 즉 "오셨던"그 1914년에 "성경연구생"(여호와의 증인)들은 예수께서 임재하셨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이전에 갖고 있었던 잘못된 교리들, 즉 피라밋 교리와 1925년에 모든 죽은 충실한 사람들이 부활되어 나온다는 예언들 등등...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들이 1919년 이후로 과연 깨끗해졌다는 말인가?

1919년 이후에도 그들은 1874년 예수임재설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1925년에 대희년이 되어서 충실한 고대인들이 모두 부활된다는 것을 가르치면서 [종말을 고한 비밀]과 같은 책을 배부하고 있었는데, 과연 그 상태가 참숭배를 회복한 상태일까? 그들은 정말 회개한 것이 맞는 것일까? 등등에 대한 고민을 하던 차에, 이책 뒤에 나오는 내용은 더더욱 정신을 번쩍 차리게 만들었습니다.(저는 이 내용을 보게된 것을 기도의 응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

18 그러면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땅” 혹은 그들의 영적 토지를 숭배 면에서 순결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사귀를 이 땅에서 떠나게 하리라”는 약속을 어떻게 성취시키셨읍니까? (스가랴 13:2) 남은자들이 기원 1919년에 그들의 “땅”에 회복되기 전에 가졌던 성서 예언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시정하게 하심으로 그렇게 하셨읍니다. 이방인의 때의 끝인 1914년에 시작된 “마지막 때” 즉 “사물의 제도의 결말”은 많은 예언들이 성취될 하나님의 지정된 때였읍니다. 이러한 예언들은 그 예언들이 성취되기 직전 혹은 성취된 후에야 이해될 수 있었읍니다. 그러므로 회복된 남은자들은 1914년 이후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 예언이 성취될 “마지막 때”를 위하여 보존하신 예언들을 새로이 조사하였읍니다. (다니엘 12:4; 계시 10:6, 7) 이 가운데는 「에스겔」과 「계시록」에 대한 재연구가 포함되었읍니다. 이 책들에 대한 해설이 시도되었고 1917년 7월에 「종말을 고한 비밀」이라는 책으로 발행되었읍니다. 그리하여 회복된 남은 자들은 이러한 말을 청종하였읍니다.

(밑줄과 굵은글씨등의 강조는크레용, [회복]책 352면)

======================

이 내용은, 제가 볼 때에 적어도 1919년 이전의 "그릇된 이해"가 "거짓예언자(선지자)"의 일에 해당됨을 시인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러한 상태를 몰아내고 깨끗하게 하였다는 증거로 내놓은 것이 [종말을 고한 비밀]이라는 출판물이었습니다. 이 책은 나중에 조사해보시면 아시겠지만, 결코 참 숭배의 회복이라고 할 만한 내용은 아닙니다.

또한 1918년 기간중에 그들은 미합중국을 찬양하는 내용의 기사를 싣기까지 했습니다.(1976년 연감 미합중국편 106면 참조)

"이것은 명백한 영적음행이 아니던가? 이런 단체에게 예수께서 1919년에 모든 소유를 맡겼다니...?"

그리고 1920년부터 시작된 "지금 살아있는 수백만이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제목의 강연과 인쇄물은 1925년에 맞춰져 있는 "새로운 거짓 예언이 아니었던가?"하는 생각이 교차하면서 마음이 착잡해 졌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과연 러셀의 오류가 그토록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면, 그리고 그것이(1919년 이전의 그릇된 이해였으므로) 거짓선지자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과연 러더포드의 주장은 그런 모든 과거를 깨끗하게 하고 하느님께 돌아서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1919년 이전의 그릇된 이해가 거짓선지자의 것이라면, 참 숭배가 회복되었다는 1919년 이후 즉 러더포드 이후의 그릇된 이해는 거짓선지자의 행동이 아니라고 말할 근거가 있을까? 아직도 거짓예언자의 기간이 아닐까?... 등등"

나는 가족과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수 많은 벗들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용기를 준 것은 모순처럼 보이게도 출판물의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

19 “따라서 우리에게 더욱 확실해진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 날이 새고 샛별이 떠오르기까지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비추는 등불에게 하듯이 여러분의 마음으로 그것에 유의하는 것이 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먼저 이 사실 즉 성경의 어떤 예언도 아무런 사사로운 해석으로 부터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십니다. 왜냐 하면 예언은 언제나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사람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는대로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베드로 후 1:19-21, 신세.

20 예언에 대한 어떠한 해석도, 그것이 역사적 사건들과 성서에 대한 더 나은 이해의 빛에 비추어 볼 때 부정확할 때에는, 누구의 해석이었든지 간에 시정되었읍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리고 그의 영감받은 말씀에 대한 충성이 이 경우에 중요한 문제였읍니다. 그러므로 요구된 충성의 예로서, 친 아들이 거짓 예언자처럼 하나님의 예언을 잘못 해석하고 고집할지라도 그 때에는 친 부모가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에서 종교적인 면으로는 아들과 관련을 갖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모세’의 율법하에서처럼 할 수는 없읍니다. 즉 아들을 죽일 수는 없읍니다. 그러나 아들에게 육체적으로는 부모일지라도 영적으로는 아들이 죽었다고 선언할 수 있읍니다. 이처럼, 상징적으로 말하여, 그들은 “그 예언할 때에 칼로 찌”르지 않으면 안됩니다. (스가랴 13:3; 또한 신명 13:1-5 비교) 부모의 온전한 동의하에 그러한 거짓 예언자는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추방되고 제명당할 것입니다. 복귀한 남은자들의 모든 성원들은 그러한 성실을 나타냄으로써 거짓을 말하는 “선지자”로 하여금 그들의 “땅”에서 떠나게 할 것입니다.

21 물론 “더러운 사귀”도 그들의 영적 “땅”에서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사귀 혹은 영이 자칭 예언자의 더러운 영감받은 표현이라면, 혹은 더러움으로 이끄는 경향 혹은 추세라면충성스러운 자들은 그것을 배척하고 저항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종교적 가르침이나 도덕적 행실에 있어서의 더러움은 하나님의 성령의 축출력에 의하여 떠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영적 토지는 깨끗하고 성경적인 생활이 영위되는 “땅”으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도덕적으로 불결한 사람은 그 “땅”에서 제명되어야 합니다.―고린도 후 6:14에서 7:1; 또한 신명 13:6-18 비교.

(밑줄 및 굵은 글씨 등의 강조는 크레용. [회복]책 352-353면)

========================

아~~~

이것은 저의 눈을 의심케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1919년 이전의 "그릇된 이해"를 주장하던 사람들은 힘없는 일개 지방회중 성원들 몇 명이 아니었기 대문입니다.

그러한 수많은 거짓예언들을 "여호와의 조직"안에 끌어들였던 사람들은 다름아닌 러셀과 러더포드 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제명당하지 않고, 엉뚱하게도 파워게임에 밀렸던 사람들만이 조직에서 쫓겨났던 것을 생각하면서 저는 파랗게 질렸습니다.

그리고 머릿속에서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이 조직이 영적으로 온전히 깨끗할 수 있도록 회개할 수 있도록 촉구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영적으로 거짓예언과 관련을 맺지 않기 위해서 떠나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깨끗해질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나는 쉽게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다시 기도하고, 고민하고, 기도하고, 때로는 울면서 매달리기도 하고... 너무나 힘든 시간들을 보냈고, 이윽고 양심적으로 연설을 할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책에서는 영적인 의미로 거짓예언자를 칼로 찌를것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충성이라고 그 책은 말하였습니다.

워치타워 출판물은 저에게 귀중한 교훈을 한 셈입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해야하나?...."

또한 그 무렵에 나온 팜플렛을 배부하는 운동은 저의 양심을 더욱 괴롭혔습니다.

그 팜플렛의 제목은 [깨어있으십시오!]였으며 당시에 특별배부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그 내용중에는 1914년을 강조하는 내용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연설을 포기하고 봉사위원회 중 한 분인 이윤*형제(당시 봉사감독자)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봉사의종을 사임할 것이며, 이유는 자세히 묻지 말아달라고... 당분간 기도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안타까워 하기도 하였지만, 그분은 그것을 어렵게 허락하는 듯한 말을 해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저는 집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저를 회중 감독자들은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들은 제가 2005년 1월 18일에 협회로 보낸 서신에 어느정도 나와있기에 그 편지의 전문을 싣는 것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 편지는 2005년 1월 19일에 회중에서 저의 제명이 발표되기 하루 전에 발송한 편지입니다. (사건을 다루는 내용이므로 관련 당사자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쓰기로 하였습니다.)

*(원래 A4용지 다섯장에 빼곡히 적어서 보낸 편지입니다. 당시에 심정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급하게 작성한 것이라, 인용부호등도 제대로 표시하지 않고 썼습니다. 그렇지만, 오타가 아닌 한 토씨 하나도 틀리지 않도록 당시의 편지 내용을 그대로 게재합니다.)

========================

수신인: 450-600 경기도 평택 우체국 사서함 33호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

워치타워성서책자협회 봉사부 귀하.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울 응암북부회중의 장진구형제라고 합니다.

이렇게 서신을 보내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오라 저와 관련된 사법문제 때문입니다.

저는 최근에 매우 유감스러운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경위를 말씀드리면 이러합니다.

제가 집회를 나가지 않게 된 것은 제 기억에 작년 10월 후반 경부터입니다. 사실 약 1년전부터 연대계산과 수혈문제에 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를테면 기원전 607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했다는 고고학적인 증거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빌론 70년"은 유대나라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나라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이 있었습니다.(예레미야25:10-12참조)

그에 더해서 2000년 6월15일호 파수대 "독자로부터의 질문"란에서는 "적혈구의 분획(헤모글로빈)"을 받아들이는 것을 그리스도인 양심문제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 이전 90년대에 "면역 알부민과 글로불린"을 양심문제로 허용하였고 헤모글로빈까지 양심문제가 되어서 사실상 모든 분획성분이 양심문제로 바뀐 셈입니다. 이것과 그동안의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피를 멀리하라"는 말씀과 어떻게 조화가 되는지 혼란이 생겼습니다.

실제로 모든 분획성분을 모으면 그 자체가 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의문을 회중에서 저와 친한 형제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형제들은 저의 그러한 의문을 위험하게 생각하기는 하였지만, 제가 새로운 가르침을 가르치려고 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는 도중에 인터넷상에서 "배교적"으로 불리는 사이트에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내용을 접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그러한 내용중에는 워치타워협회가 국제연합에 비정부기구로서 협력하였다는 내용도 들어있었습니다.

그러한 내용을 처음에는 배교자들의 거짓말로 보았지만, 국제연합 사이트를 직접 조사한 결과 일부는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물론 현재도 그러한 배경을 모두 알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여러가지 이유로 제 머리는 혼란스러웠고 무척 당혹스러워졌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작년 10월에 성서읽기의 주요점을 다루도록 임명받게 되었습니다. 저는 많이 기도하고 묵상한 결과 회중에서 연설을 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그것은 제가 혼란을 겪는 와중에 누군가에게 연설을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연설을 "펑크"내었지요. 얼마 후 회중의 장로분이셨던 이윤* 형제를 만나서 저의 심정을 약간 말씀드린 후 봉사의 종을 사임할 의사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집회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저의 생활이 조용히 그냥 보낼 수 있게 되지는 않았습니다.

11월과 12월 두 달 동안 회중의 주임감독자이신 황호* 형제가 다른 한 명의 장로와 함께 찾아오셨습니다. 오실때마다 같이 동행한 장로형제는 달라졌지만 황호* 형제는 항상 같이 오셨습니다.

그때 황호조형제는 제게 "돌아오라"고 하셨고, 저는 당분간 "내버려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마도 이 시기에 회중에서는 저에 대한 소문이 돌았던 것 같습니다.

그 중 일부는 찾아오신 장로형제를 통해서 듣게 되었는데 주임형제와 같이 오셨던 박기* 형제는 제가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고 대속을 부인했다는 소문을 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무척 당황스러웠지만 그러한 말을 한 사실이 없다고 말씀드렸고 그런 내용은 그냥 넘어가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주임감독자 형제는 제가 일부형제들에게 연대와 수혈문제에 대해 말함으로 혼란을 주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저에게 머릿속에 있는 것을 무조건 지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노력은 할 수 있지만 무조건 지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드렸죠. 또한 기도하고 성경을 묵상하면서 제게 어떻게 응답하실지 모르므로 기다려보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회에 나가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나중에 몇 개월 지난 후에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고도 말씀드렸고요. 그리고 제게 무엇이 영향을 주게 되었는지를 물어보신 후에 인터넷접속과 그러한 곳에서 보게 된 자료를 지적하셨습니다. 저에게 집에 있는 자료를 모두 가져오라고 하셨고 저는 집에 있는 출력물을 모두 내놓았습니다. 그 중에는 [양심의 위기]라는 영문출판물이 있었는데 예전 관심자가 선물로 준 책이었습니다.

그 책은 수년간 통치체성원으로 봉사하셨던 레이몬드 프랜즈형제가 쓴 책이었고요. 저는 그 책을 포함해서 장로형제들이 우려하는 모든 자료를 순순히 내드렸습니다.

주임감독자가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왜 이 말은 듣는 거지" 그래서 저는 대답했습니다. "성경에는 연로자들을 존중하라는 말씀이 있기에 성경과 반하는 말이 아닌 한 따를 수 있습니다."라고요. 형제는 참~ 하면서 웃으시더라고요. 그리고 그것들을 불태우도록 요구하셨습니다.

저는 주택가라서 이곳에서는 소각이 힘들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가지고 가시겠다고 하셔서 그러시라고 말씀드렸더니 그냥 저보고 밖으로 내놓으면 나중에 종이수집하시는 분이 가지고 가실거라고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제들은 나가셨습니다. 저는 그날 바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며칠 후에 밖에 내다 버렸습니다.

그리고 회중장로들은 저에 대한 징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저는 그분들이 양심에 따라서 정말로 기도한 후에 결정하시는 것이라면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존중해 드리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공개책망까지는 제가 납득할 수 있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 후에 회중에서는 저를 지목으로 다루었다는 얘기를 동생을 통해서 들었습니다.

사법모임 같은 것은 없었지만, 그것은 제게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문제가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그 후에 12월 말경부터 1월2일까지 회중에서는 순회방문 마련이 있었습니다.

그 때 1월1일 토요일 오전 10시경에 순회감독자와 주임감독자형제가 저희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순회감독자 형제이신 장인* 형제는 저에게 요즘 많이 힘드냐고 말을 건네신 후에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걱정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가 거론하기 껄끄러워하는 1914년 문제를 다시 꺼내셨습니다. 그분은 저에게 1914년에 예수께서 임재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그에 대해서 왕국의 왕으로 임재하신 사실은 하늘에서 있었던 일이기 때문에 제가 볼 수 없었고, 그래서 제가 있었던 것을 부정하는 것도 교만한 일일 것이기에 확실히 말씀드릴 수 없지만, 연대계산 자체는 수학적인 문제이므로 그것은 해 볼 수 있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계산에는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지만 순회형제는 현재 통치체가 해설하는 내용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배교로 볼 수 있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렇게 또다시 그런 쪽으로 몰아가는 듯한 분위기가 무척 당혹스러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고향을 등지고 타국으로 피신했던 다윗처럼 그렇게 저를 보시면 안되겠냐고 했습니다. 그가 기름부음받은 자를 대적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도 말씀드렸습니다.

또한 형제들에게 이러한 사실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고 요구하신다면 그러한 요구도 따를 수 있다고도 말씀드렸습니다.

제 견해는 언제나 바뀔 수 있기 때문에 당분간 그냥 내버려두시면 안 되겠냐고도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황호*형제는 당분간 기다려달라고 해서 지금까지 기다렸는데 그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러저러한 말씀을 하시고 또 들으시더니 그날 두 분 다 가셨습니다.

그 다음날 일요일에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저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주임감독자께서는 저에게 조금 뒤에 회관지하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순회감독자형제가 잠간 만나고 싶어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서둘러 밥을 먹고 나서 회관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 장소에는 회중 장로형제들이 한 분만 제외하고 모두 와 계셨습니다. 저에게 앉으라고 권하시고는 저에게 하시는 말씀은 우리 장로들은 이 문제를 그냥 넘어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더니 제게 진술서를 그냥 쓰지 그러냐고 장인준 형제가 저에게 제안했습니다.

처음엔 무슨 뜻인지 어안이 벙벙했는데 곧 그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제가 "탈퇴서요?.."라고 말씀드리니까

"우리는 한 배를 타고 갈 수가 없어요. 장 형제가 그렇게 하는 게 더 유익할 것 같은데.."라면서 다시 권유하셨습니다.

제가 그 자리가 약간 이상해서 "혹시 이거 사법모임인가요?"라고 질문드리니까

장인준 형제는 "사법모임은 아니에요. 그냥 그 전에 한번 들어보려고 부른 거지."라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는 무거운 분위기가 흘렀고 제가 질문했습니다. "왜 배교로 보시는 건지..?"

장인*형제는 말했습니다. "장형제 지금 연대의문있죠? 그리고 수혈문제도 의문이 있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이건 사실 배교로 볼 수 있어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는 후메네오와 알렉산더의 예도 언급하셨습니다.

저에게 한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인정하는가?

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부분적으로 인정합니다.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은 기름부음받은 성원 전체이며 통치체는 다만 대표할 뿐입니다. 그리고 출판물의 내용은 계속 변경이 되어왔습니다."

그분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부분적인정은 인정이 아니에요.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한 배를 타고 간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저는 대답했습니다.

"제가 주요교리에 의심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삼위일체에 대한 견해나 영혼불멸 지옥불에 대한 견해에 제가 협회를 통해 배운것은 감사합니다. 하지만 연대문제는 계속 틀려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틀릴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왜 주요교리에 들어가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장인* 형제는 제게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연연하는지 이해가 안가요. 혹시 가족들 때문인가요"

그 자리에서는 이러저러한 약간의 공방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저를 약간 화나게 했던 것은 장로형제중 한분인 이윤* 형제의 말이었습니다.

"말씀도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한데요. 장형제에 대해서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뭐 장형제가 예수께서 1세기에 오셨다는 것도 부인하고 그리스도도 부인했다는데..."

저는 기가막혀서

"지난번에도 박기*형제랑 주임형제랑 오실때도 그 애기가 나와서 그때는 그냥 잘못 들었나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이렇게 집요하게 말씀하시는 것 보니까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내는건 아닌지 저도 궁금해요. 그걸 부인하면 성경 전체를 부인하는 건데 그럴리가 있나요?..."

아무튼 이런 화나게 하는 증언을 포함해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그리 강압적이지는 않았지만, 저를 무척 당혹스럽게 만드는 분위기였습니다.

탈퇴서를 내던가 제명처분을 받던가 둘 중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저는 일주일간 여유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일주일안에 써서 제출하라고 하셨고 저보고 나가봐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장로들은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저는 저에 대한 일부 중상에 대하여 그렇게 말했다고 하는 형제를 찾아가서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해당 장로형제에게 제가 하지 않은 말에 대해서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항의했습니다.

그분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냐면서 그냥 대수롭지 않게 넘기셨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그럭저럭 넘어갔지요.

1월12일 제가 시한을 넘긴 다음주에(저는 탈퇴서를 쓰지 않았습니다.) 그 주 수요일 오후에 주임형제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그냥 탈퇴서를 안쓰면 그냥 넘어가거나 아니면 사법모임을 열게 되면 그때 말씀드릴 기회가 다시 생길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후에 갑자기 온 전화는 그날 저녁에 모임을 갖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그 주간에 회사근무가 늦게 끝나기 때문에 시간을 정확히 말씀드릴수가 없다면서 곤란해 했습니다. 그러자 주임형제는 저에게 탈퇴서는 어떻게 되었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굳이 그걸 써야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저에게 뭐 바뀐것은 없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특별히 생각이 바뀐것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꼭 서야하냐고 했습니다.

그러자 형제는 저에게 우리가 쓰라고 강요하는게 아니고 그냥 안쓰게 되면... 오늘 안와도 좋으니까 그럼 그냥 다음주 수요일에 발표하는걸로 알고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항소를 하려면 그 안에 하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사법모임이라면 사법위원명단을 알고싶다고 했더니 그런것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냥 장로들모임에서 결정한 거니까 사법위원명단은 따로 없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네에~~"하고 힘없이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내일이 발표하기로 한 날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이러한 문제는 사법모임을 통해서 처리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제 얘기를 충분히 들었다고 판단하셨을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절차는 그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저께(일요일집회후) 저의 어머니께서 장로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분들은 나름대로 고민하셨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왜 사법모임을 갖지 않았냐고 어머니께서 항의하시니까 수요일 저녁에 장로들끼리 모임을 가졌다고 하더랍니다. 그것이 사법모임이었다고요...

또한 지목발표 이후로 제가 한 형제에게 국제연합관련 사실을 유포한 것을 도저히 묵과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것은 사실 제가 의도적으로 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형제에게 알 필요가 없다고 했음에도 계속 말해달라고 해서 유엔문제만 알려준 것이었습니다. 연대나 기타문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저를 배교로 보아야할 사항이었나 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저는 동료들과 현재 거의 교류를 못하고 있지만(특히 지목발표후로는 연락이 끊어졌음) 그래도 길에서 인사도 못하는 일은 피했으면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저를 배교로 몰아가는 이유가 뭔가요?

만약 회중을 보호하자는 차원이라면 집회참석도 안하고 형제들을 만날일이 거의 없는 저에게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또한 사법모임이라는 말씀도 안하시고 나중에 부모님에게는 그 수요일저녁에 장로들끼리 사법모임을 가진것이라고 했다는데 사법모임은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통보해서 안 오면 그 다음에 한번 더 통보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그런 절차도 주어지지 않았고요. 왜 이렇게 하는 건지요?

러셀형제는 1914년1월1일호 파수대에서

"연대적인내용을 교리적인것과 똑같이 절대적으로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연대는 기본적인 교리처럼 확정적으로 성서에 언급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직도 믿음으로 행하고 있는 것이며 보는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믿음이 없거나 불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성실성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후에 1914년 10월에 가서 교회가 영광스럽게 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주의 뜻이 무엇이든지 간에 만족하려고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76년 연감 66면 참조)

인용한 부분에서 밑줄친 부분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저를 판단하신 일부 장로들과 순회감독자형제는 기원전 607년과 2520년에 의문이 있다는 것은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부분적 인정은 인정이 아니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숫자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그리고 제가 전면부인도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굳이 배교로 보아야 하나요?

출판물의 내용을 대부분에 동의해도 만족하지 못하고 전적인 동의를 요구하시는 것은 지나치지 않은가요? 설사 그렇게 못한다고 하더라도 비장성이나 약한사람으로 보지 않고 악한 배교자로 보는 것에는 양심의 거리낌도 없는건가요?

이것이 단지 지방회중장로회의 견해나 한 순회감독자의 견해가 아닌 협회차원의 견해라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보입니다.

전적인 신뢰나 동의는 성경과 하느님께만 속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처리를 바로잡아주실 것을 탄원합니다.

제가 장로형제에게 직접 항소를 하지 않고 이렇게 서면으로 항의의 의사를 전달하는 것은 문제를 처리하는 과정자체가 원천적으로 무효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에게있어서 사법모임을 통보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또한 사법모임에 나가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임감독자 형제는 제게 86년 5월 15일호 파수대 독자로부터의 질문을 참고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협회의 해설은 자주 바뀌어 왔습니다.

현재의 일부 교리들도 변경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을 연단에서 연설로 지적한 적도 없으며, 형제들에게 새로운 교리를 가르친 적도 없습니다. 단지 혼란을 가져 올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제명을 시킨다면 이것에 대해서는 여호와께서 문제를 바로잡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이 서신에 대한 답장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일인지요?

부디 간단하게나마 답장을 기대합니다만, 답장이 안오더라도 제 얘기를 할 기회가 되었기에 제 마음을 달래기에는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혹시 생겼을지도 모르는 오해를 해명하였을 기회도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상으로 편지를 마치면서 어울리지는 않지만 따뜻한 그리스도인 인사를 드립니다.

2005년 1월 18일 화요일 장진구 드림.

발신인:서울시 은평구 증산동 131-135호 장진구

===========================

저는 이 편지를 보낸 다음날 수요일 집회에서 제명 발표가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습니다.

그리고 약 한달 후 협회로부터 간단한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내용은 "장형제의

편지를 잘 읽어보았으며, 상소위원회를 마련하였습니다. 모임장소에 나오셔서 솔직하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바랍니다."라는 아주 간단한 내용이었습니다.

제가 제기한 어떤 문제에 대해서도 답변이 없었으며, 단지 상소위원회를 마련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상소위원회는 이 문제를 다루면서 너무나도 어이없게도, 이미 그만둔 집회참석과 야외봉사를 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배교자의 특징"이라고 몰아부쳤습니다.

상소위원회가 문제를 다룬 방식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차후에 쓰도록 하겠습니다.(언젠가는 또 기회가 있겠지요...*^^*)

7. 어제는 우리 어머니가 "양치는 방문"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공개하는 것을 매우 신중하게 고민했지만, 요즘 유엔가입 문제가 다시 입에 오르내리고 있기에 말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방문하신 분은 김창률 형제.... 이 카페에서는 이 분을 기억하는 분들도 많으실 것입니다.

(저는 인터넷 상에서 타인의 실명을 언급하는 경우가 없습니다만, 여행하는 감독자 및 지부위원 그리고 일반 장로가 아닌 사법모임을 주최한 장로의 경우라면 "공인"으로 간주하여 실명을 언급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한 때는 봉사훈련학교에서 강사로 상당기간 계셨고 지금은 다시 지역감독자로 일하고 있는 분입니다.

이 분이 회중 장로 한 분과 함께 어머니를 찾아왔습니다.

어머니는 이 분이 찾아오신다는 말에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어린시절부터 김창률 형제와의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어머니가 집회에 자주 빠지시는 것에 대해 굳이 따지려고 오신 것은 아닌듯 합니다.

그분 특유의 격려가 있었다고 합니다.

따뜻함과 온화함으로 상대를 녹여서 무장을 해제시켜 버리는 아주 훌륭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 분입니다.

한 봉사훈련학교 졸업식에서는 졸업생의 이방인 아버지(많이 반대하셨을)가 참석하시자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잘 오셨습니다"라면서 악수를 청했던 일화도 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때 이분(당시에는 순회감독자)의 연설을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단 몇초도 집중을 풀지않고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무튼 제게도 참 따뜻하게 개인적인 관심을 가져주셨던 분이라서 기억에 남습니다.

몇 년 전에 이곳으로 이사왔을 무렵에는 저희집에 공중전화로 전화를 하셔서 안부를 묻기도 하셨지요.

아마도 옛날 사람들이 기억에 남아서 수첩에다가 적었다가, 십년이 넘어서 다른 지역의 지역감독자로 일하고 있을 때에도 가끔 자신의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인상적이었습니다.

약간 사무적인 일부 여행하는 감독자들의 태도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지요.

이야기가 잠시 곁길로 빠졌습니다만, 우리 어머니께서는 이분에게는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셨나봅니다.

이야기 도중에 어머니는 제가 제명된 직후에 방문해서 연설했던 (지부감독자) 박종일 형제에 대한 언급을 하셨습니다. 그분은 봉사강연 중에 1975년 문제가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며 협회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이러한 박종일 형제의 발언은 다른 지역에서도 가끔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한 연설을 들을 때 어머니가 흥분하셔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다는 것을 말씀드리자 이분의 이야기는 이러했다고 하네요.

"강 자매는 박종일 형제를 보고 여호와를 섬기시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실망을 시킨다고 해서 그 사람을 보고 하느님을 믿는 것은 아니기에.... 저도 강 자매를 실망시킬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시면서도 어머니의 감정을 잘 다독여주는 기술을 발휘하셨다고 하네요.

또한 1914년 세대 개념의 변경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였고, 마지막으로...

협회의 유엔가입 문제에 대해 언급을 하였다고 합니다.

"김창률 형제!! 저 사실 이런말씀은 드려도 되나 모르겠는데..."

"무엇이든지 괜찮습니다. 말씀하세요."

"저.... 협회가 국제연합에 엔지오로 가입했다는 이야기를 진구(크레용)한테 들었어요. 그런데 우리 진구아빠하고 참 많이 고민했거든요. 도대체 왜 가입했을까?..."

"강자매!! 협회가 왜 가입했는지 그것을 고민하십니까? 그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성경에서는 나라들은 짐승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국제연합은 형상입니다. 왜 형상인지 아십니까? 나라가 되려면 주권과 국민과 영토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국제연합은 영토도 없으면서 권력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나라들이 만든 형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우상과 협회가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인터넷에서 배교자들이 그런 소문을 퍼뜨린다고 합니다.

작년 지역대회때엔 배교자들이 피켓을 들고 와서 '워치타워 유엔가입'이라는 문구를 들고 있었습니다.

오래전에 배교한 분들이지요.

하지만 협회는 그런 적이 결코 없습니다.

제가 지역감독자 아닙니까? 제가 그것을 아는데, 협회는 유엔에 가입한 사실이 전혀 없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으로 고민하십니까? 왜 가입했을까를 왜 고민하십니까? 가입은 100퍼센트 사실이 아닌것을요...."

너무나 강한 확신을 가지고 말씀하시길래 어머니는 더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또 이야기가 진행되다가(아마 연대문제였을 것임) 성구 하나를 낭독하셨는데,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사라들이 식인행위를 생각하고 떠나간 점에 대해 언급하시고 나서 어머니께 질문하셨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실족하여 떠나갔습니다.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베드로는 이해를 했을까요?"

(좀 생각하시다가)"아니겠지요"

"맞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어떻게 했습니까? 예수께서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시자, 베드로는 '영생의 말씀이 당신에게 있는데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 다른 곳에 갈곳이 없어서 이 조직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 조직이 참 조직이고 참 종교이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

어머니는 이 부분에서 마음이 푸근해지면서 모든 의문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유엔 문제, 연대문제... 이런 것들은 풀리지 않았지만 인용한 성구와 그것에 대해 설명하는 그분의 말에 마음이 녹은 것입니다.

흠.... "말하는 기술" 정말 탁월한 분입니다.

이 분은 어머니께, 아들과 영적으로 교제하시지 말라고 충고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회때 사회자실로 꼭 부부가 찾아와 달라고 당부를 하셨다고 하네요.

이 시점에서 저는 새로운 의문이 들게 됩니다.

지역감독자 김창률 형제는 정말로 협회가 엔지오로 등록된 사실을 몰라서 그런 말을 한 것일까?

아니면 철저한 위선일까?

작년 봄에는 어떤 관심자가 협회로 직접 전화를 걸어서 엔지오 가입에 대해 문의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의 답변 역시 "가입한 사실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제 한국지부의 대응방식이 이렇게 결정된 것일까요?

아예 가입한 적이 없다는 식으로 여행하는 감독자들에게도 교육하는 것일까요?

그래서 그 지역감독자는 협회의 지시를 믿고 그렇게 발언한 것일까요?

아니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능숙하게 연기를 한 것일까요?

적어도 제가 아는 김창률형제는 결코 그런 분이 아니었는데 말이지요.

점점 협회의 대응방식 때문에, 일반 증인들은 사실 자체를 알아내기도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답답해져옵니다.

많은 생각들이 오고간 날이었습니다.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