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 11/30/2024 -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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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베델 - 이방준 형제 이야기

무상님께서 쓰신 글입니다.
 
(오래된 기억만 의존해서 쓰는 관계로 연도 등 세밀한 부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음을 감안하여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방준 형제 !
1936년 함경도에서 출생하였고 2000년 65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한 이방준형제는 
6.25전쟁 때 월남하여 남한에 일가 친척이 별로 없이 외로운 인생을 사신 분이며, 
 
 
50년대 중반에 조직에 들어 와서 60년대 중반부터 순회감독 생활을 시작하였고 
지역감독을 거쳐 1978년부터 서대문 지부사무실에서 봉사부 부감독으로 채수완형제를 보필하게 된다
 
 
좌충우돌하는 면도 있었지만 성격이 쾌활하고 사교성이 좋았으며, 
나름 유모어도 즐길 줄 아는 분이라서 많은 형제 자매로부터 사랑도 많이 받으신 분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채수완형제로부터는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해서 수시로 싫은 소리를 듣기도 했다
 
 
이방준형제보다 조금 뒤에 벧엘에 들어와 봉사부에서 같이 일하게 된 
김인복형제 사이에 형성된 경쟁관계를 피곤하고 힘겨워 했지만 
채수완형제 비위를 맞추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신 분이다
 
 
그런 이방준형제가 1995년경 채수완형제 지부위원 해임되던 같은 시점에 갑자기 지부사무실에서 방출되게 된다
 
 
방출이유는 채수완형제 지부위원 해임과 관계가 있다
 
 
채수완형제가 지부위원에서 해임되는 원인이 되었던 한국지부 내 내밀한 정보를 외부로 누설하였다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방준형제가 그 문제와는 무관하였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음에도 그는 복권되지 못했다
동일한 의심을 받고 같이 방출되었던 박준서형제는 복권되어서 순감으로 임명되고, 
지감으로도 일했지만 이방준형제는 죽을 때까지 복권이 되지 못했다
 
 
복권이 되지 못한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이형제가 방출된 이후 행적과 관련이 있다
 
 
이방준형제는 오래 전부터 한국 형제들이 중립을 지키기 위해 군에 자진 입대한 후, 군복무를 거부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보았다
한국지부는 70년대 중반 유신정권이 출발한 이후, 정부로부터 오는 압력을 두려워했다
 
 
병역기피자를 양산하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종교 등록을 취소하여 
합법적인 종교활동을 못하게 하겠다는 등의 압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당국과 암묵적인 합의 하에 군입대 후 군복무 거부 형식으로 일단 병역기피자를 없애는 방향으로 타협점을 찾은 것이다
 
 
이방준형제는 바로 이것이 문제라고 보았다
 
 
병역을 거부한다 해도, 일단 군입대를 통해 군번을 부여 받고 군복을 입는 행위는 군인의 신분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중립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고, 더군다나 군 형무소에서 군대에서 사용할 비품 등을 만드는 
노역에 참여하는 일은 중립 원칙 상 용납할 수 없는 일인데, 
한국 지부위원회의 잘못된 판단으로 많은 형제들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으로 만들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방준형제는 정상적으로 중립을 지키려면 병역법상의 군 입대 거부의 문제로 처벌을 받아야 하는데, 
군인의 신분으로 군 형법상 명령불복종 죄로 처벌 받는 것은 조직이 표방해 왔던 중립의 원칙과는 분명히 차이가 있다고 봤다
 
 
그러므로 이방준형제는 이러한 편법을 유도하고 용인해 온 한국지부가 이 문제에 책임이 있는 것이고, 
미국 통치체는 한국지부위원들의 이런 불법 행위를 모르고 있을 것이다 라고 생각했으며, 
이러한 불법 행위를 통치체에 알려서 한국지부위원들의 책임을 묻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형제는 여러 경로로 이 문제를 통치체에 알리고자 노력하였으며, 
자신이 직접 미국을 방문하여 통치체 성원을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고자 했고, 
결국 2000년 초에 미국에 건너 가 당시 브르클린 벧엘가족이었던 김헌 형제 등의 도움으로 
통치체성원은 아니었지만 본부의 유력인사를 만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만남과 이의 제기는 이형제를 만족시킬 결과로 이끌지 못하고, 변변한 답변도 얻지 못하게 된다.
 
 
이형제도 그런 일이 있은 후 깨닫게 되었지만, 
이 문제는 한국지부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었고 통치체도 알고 있는 일이었으며, 
한국지부의 원활한 종교 활동을 보장받기 위해 정부 측과 적당히 타협을 한 일이었으며, 
통치체가 사전에 승인한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이형제는 헛물을 켜게 된 것이고, 크게 낙담하고 실망하였다
 
 
그런 사실을 감지했을 즈음, 자신의 몸에 급성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음을 알게 되어 급히 귀국하게 되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는 귀국한지 한달 여 만에 대전 김익수 형제가 운영하는 통증치료 병원의 어두운 골방에서 
푹푹 찌는 어느 더운 여름 날 밤 숨을 거두게 되며, 화장터에서 한 줌의 재가 되어, 
과천 언저리 어느 형제 집 뒤뜰 정원에 묻히게 되는 것으로 기억 속의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런 후 얼마 되지 않아서 한국지부는 형제들의 중립문제를 군입대 후 거부가 아닌, 입대 전 거부를 하는 쪽으로 유도했고, 
한 때 절대 불가라고 했던 대체복무 쪽으로 여론을 호도하는 방향으로 대처하고 있다
 
 
 
군사정권이 끝나고 압력을 주는 정부기관도 더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 불쌍한 이방준 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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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류비의 이미지

90년대 중반이었다고 기억한다.아버지께서 이방준 형제와 함께 식사를 하실 때 함께 했었다. 형님은 영어학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King's English와 Queen's English에 대해 학교선배처럼 열정적으로 말씀해 주셨다. 특히 개인적으로는 영어사전 수집이 취미인 나로서는 영어사전들간의 비교를 하실 때, 나름 격렬한 토론도 있었다. 나는 당시 열렬한 Cobuild 사전 팬이었기에 이방준 형님과는 각이 있었지만 웹스터와 아메리칸 헤리티지 사전 등도 좋아했기에 그냥 코빌드 사전을 소개하는 것으로 논은 마쳤다. :)

확실히 영어학습에 열정적이었던 분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몇년이 지나고 나서, 어깨너머로 들었다. 알콜중독이 심하시다고... 뭔가 억울한 일이 있으시다고까지 들었었다.

무상님의 글을 읽으니 이해가 많이 된다. ㅠㅠ

류비의 이미지

"채수완 고발 투서"는 이방준 형님께서 쓴 것이 아니었다!
 
 저도 마지막 줄은 본문의 '무상'님과 같네요. 한 글자만 빼고...
 
아~ 불쌍한 이방준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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