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01/21/2018 - 21:58

Article

백*건 변호사는 왜 구치소에 들어갔는데도 이탈처리 되었는가?

네이버에서 "백*건 변호사"(이하 백*건님)를 검색하면 많은 기사가 노출된다.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것이야 훌륭한 일이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변호사란 조금 특별한 자격증을 소유한 사람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그에 대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그가 가진 '상징성'에 있을 것이다. 극도의 저학력사회인 여호와의 증인 사회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것은 희소성 면에서 큰 의미를 갖고, 그가 여호와의 증인 남성이기에 그가 어떻게 신성한 병역의 의무라는 언덕을 넘어갈지를 주목해왔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현역으로 복무하지 않을 경우, 몇 가지 다른 방법으로 국방의 의무를 마치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들은 대체로 집총이 필요 없는 민간 업무들이다. 예를 들어 가수 싸이가 했던 병역특례업체 근무의 방법도 있고, 공익근무도 있고, 변호사 자격 소유자의 경우, 법률공단에서 근무하는 방법도 있다. 

문제는 "기초군사훈련"이다. 예전에는 4주훈련이라 칭했는데, 현재는 7~8주간의 훈련이다. 물론 그 훈련기간동안에는 '집총(執銃)'이 필요하다. 

필자의 경우, 대학 재학중에 공익근무요원으로 소집되었었다. 집총 거부로 당연히 '영창'에 들어갔으며, 영창에는 본인을 포함해서 6명의 증인 형제들이 있었다. 특이한 것은 그들 중 한명의 친척이 헌병대장이었다. 헌병대장은 다른 형제들은 놔두고 그 친척이라는 인하대 출신 형제와 필자만 사무실로 데리고 가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회유를 했다. 강수(強手)의 방법으로는 가슴을 워커발로 차서 몸이 붕 떠서 벽에 날아가 박힐 정도의 폭행도 있었지만, 대체로는 좋은 학교 다니는 친구들이 왜 그러냐는 부드러운 회유였다. "지금 바로 훈련소로 돌아가게 해주겠다. 훈련소로 돌아가면, 너희 둘은 막사에서 아무것도 안해도 된다. 물론 집총도 안해도 된다. 청소 정도만 하면서 나머지 3주를 버텨라. 그리고나서 공익근무를 하는 것조차 너희들의 양/심/에 문제가 되겠느냐?"라는 논리의 말씀이셨다. 논리적으로 내 개인적으로는 받아들일만한 제안이라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실제 경안천 둘레를 돌아다니면서 자연보호활동을 하는 것이 실근무내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업무라면 많이 하고 싶었다. 젊은 나이였고, 하고 싶은 것이 많았던 시절이었기에, 고작 4주라는 짧은 훈련을 거부했다고 3년이라는 긴 시간을 교도소에서 보낸다라는 것은 정말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내가 그런 회색지대를 통과하여 공익근무를 하게 될 경우, 영창에 남을 다른 형제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 다른 수많은 조직내의 후배 형제들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가... 결국 군 영창에서 106일이라는 긴 시간을 보내고 민간교도소로 이감되어 3년을 복역하였다.

백*건님의 이탈소식을 들었을 때, 본인의 경험을 비추어 생각하니, 그 이탈처리 이유와 과정이 바로 머리에 그려졌다. 백*건님은 아주 더 많이 법률공단에서 일하고 싶어했었을 지도 모른다. 어떤 변호사가 징역을 살고 또 5년간 면허 정지를 받고 싶어하겠는가? 어떤 부분에 있어, 병역거부를 하는 과정에서 여호와의 증인 조직의 방향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고, 그 갈등이 쉽게 해소되지 못했지 않을까 하고 개인적으로는 추측할 수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그의 양심에 기반을 둔 결정이 슬기롭지 못한 결정으로 간주되어서, 여호와의 증인 조직에서 '이탈처리'된 것으로 개인적으로 추측해 보았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그는 그렇다면 "8주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았는가이다. 군사훈련을 합법적인 방법으로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원했던 것이지 그가 군사훈련 자체를 받고 싶어했을리는 만무하다. 그런데 결과는 "이탈". 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것은 없다. 적어도 여호와의 증인에게는...

오직 "종교적 병역거부"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 후배님은 이 조직을 잘 몰랐던 것일까? 백*건님의 법논리와 양심적 판단에 의거하면 "이탈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이다". 다른 형제들에게 본이 안될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보고 법적으로 검토해 보아서, 본인에게 주어진 합리적인 기회를 선택하고 싶어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JW.ORG 세계엔 '양심'의 역할이 없다.

실제 "이탈되다"라는 표현은 언어적으로 말이 안된다. '이탈하다', '제명되다'는 말이 되지만 '이탈되다'는 참 어려운 표현이다. 하지만 증인조직에선 이렇게 어려운 말이, 말이 된다. 그들은 실제 "제명(제적)"시켰지만 그런 능동태 표현을 사용할 경우, 병역거부를 하지 않은 자에 대한 종교적 압력을 가한 동사의 주체가 되어 드러나게 된다. 그렇기에 JW.ORG는 본인이 집총하는 행위를 통해 '이탈행위'를 했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탈이 되어 진다"가 진실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필자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여호와의 증인 조직이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목소리를 내는 것에 대해 정신적 구역질이 나옴을 참을 수가 없다. 그대들은 대한민국 사회의 발전과 민주주의의 발전에 따라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감지덕지인 사람들이다. 신성한 국방의무의 민주적 진화과정에 참견하려는 속과 겉이 다른 JW.ORG의 목소리는 참으로 허무맹랑하다.

21세기의 바리세인 JW.ORG여! 양심적인 결정으로 군대 갔다온 아들과 부모가 한집에서 사는 것을 허하라! 부모형제가 군대 갔다온 아들의 결혼식에 참여하는 것을 허하라! 그 비/인/권/적/ 교리를 바꾸란 말이다 제발! JW내의 비민주적, 비인권적 요소들이나 먼저 고쳐가며, 장화신은 고양이의 눈빛을 하며 겸허히 기달려라. (2016년 9월 5일 한국 엠네스티 지부에 전화로 JW.ORG의 비인권적 교리에 대해 제보하였다. 엠네스티는 '인권'의 의미에 맞게, 이와 같은 JW.ORG의 비인권행위에 대해서 '언급와 시정요청'이라도 하면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엠네스티의 활동은 비인권적 조직을 돕는 것이 되어 버린다.)

백*건님은 여호와의 증인이 '권총자살'과도 같다는 대학교육을 받았다. JW.ORG의 세상에선 그것부터가 에러인 것이다. 거기에 대체적으로 좋은 직업으로 여겨지는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이 또한 여호와의 증인 조직이 권하지 않는 길이다. 이 조직은 대학을 가지 말라고 위협하지만, 결국 중요한 업무를 하는 자리에는 소위 SKY대학을 졸업한 인재들이나 특수 자격증을 취득한 프로페셔널들이 "귀하게 쓰이는 그릇으로"으로 활용될 때도 많다. (수십년을 주임 장로로 조직을 섬겼던, 필자의 부친은 막내 아들을 해외로 유학 보냈다는 이유로 장로직분에서 해임되었다.) 필자가 자란 도시에서, 필자를 제외한 십여명의 JW동배형제들 중, 검정고시가 아닌 정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단 한 명 있으며, 전문대를 포함하여 대학에  진학한 친구는 전무하다. 한겨례 기사 속 백*건님의 꿈과 비슷했던, 그 친구들의 '꿈'은 다 어디로 갔는가? 다음 동영상에 나오는 세르게이라는 어린이에게, 교도소에서 제공하는 하얀 편지지에 153볼펜으로 위로의 편지를 쓰기를 권한다. 어른 세르게이에겐 쓸 필요가 없다.

 

현재시점에서, 백*건님은 수감중이라 회개하여 복귀하는 과정을 못 마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무엇을 회개했을까? 어짜피 집총을 하겠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는데... "협회의 일괄적인 신권정책(theocratical policy)에서 벗어나는 예외적인 길을 가려고 시도해서 잘못했습니다. 이제부터 더 잘 순종하겠습니다."라는 내용일까? 복귀되어 조직의 품으로 돌아오면, "감히 조직과 각을 세운" 만용 내지는 욕심을 부린 것, 또는 적어도 다른 형제들을 배려하지 못했음을 후회하겠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지난 일들인 것을... 이제는 3년 아닌 보다 짦은 징역만을 보내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그 동안 법전 공부하느라 등한시 했을지 모르는 인문학 독서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기를 징역선배로서 추천해 주고 싶다.

재능있고 유능한 젊은이가, "양심적 병역거부"일 수는 절대 없는 "종교적 병역거부"로라도 사회와 차단된 생활을 하게 되었고 향후 그 전문성을 오랜 기간 활용하지 못하게 되었다니 정말 많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증인으로 복귀 절차가 잘 마무리되더라도 그 논리와 비판정신을 잃지 말기를...

카페에서 만나요...

 

P.S.

 

**웹마스터공고 - 본 기사의 사실여부에 이의(異議)가 있으신 독자는 빠른 연락을 부탁드립니다.

댓글

admin의 이미지

HearAids33의 이미지

http://www.huffingtonpost.kr/2016/09/12/story_n_11970096.html?utm_hp_ref...
JW은 본 기사에서 언급된 것과 같이 "떡이나 먹고 굿이나 보면" 감지덕지이다.

InfoCafe의 이미지

우리 카페의 한 회원이 2012년 백*건 변호사와 접촉한 후 이메일로 [여호와의 증인의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토론하였습니다.
 
저는 이 회원의 요청으로 상당기간 이론적인 대화를 하였고 그 덕분에 그 토론의 전문을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증인 특유의 방어기제를 쓰고 있는 백변호사지만, 그의 사상적인 고뇌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헌법소원과 항소투쟁을 통해 대체복무를 실현하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지금 실형선고를 받아 복역중입니다. 장문의 토론이지만 차분히 읽어본다면 많은 생각거리를 줄 것으로 확신합니다.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AMTdh" <[email protected]>받는사람: “백*건”<lawyer***[email protected]>날짜: 2012년 4월 18일 수요일, 14시 01분 50초 +0900제목: 백변호사님 문의드립니다.
 
백*건 변호사님
 
얼마전 전화드린 용인의 이동현입니다. 전화로나마 잠깐 대화할 수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몇달 간 저희 집안과 종교문제로 머리가 아팠는데 이제 좀 정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것은, 저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사람입니다. 비록 우리가 분단국가이고 방어적 개념의 군대를 가지고 있지만, 지구상 어디에서도 군대를 합리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정권에 의해 악용될 수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을 고려하더라도 위험성이 상존한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특정 국가가 군대를 보유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자신의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이에게는 다른 방법으로 나라를 위하는 길을 모색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국가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대체복무가 하루 빨리 도입되어야 합니다.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집안사정상 관심을 갖게 되었고 더불어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에 대해 새삼스럽게 알아보고 고민하는 시간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제가 변호사님께 꼭 대답을 듣고 싶은 것이 몇가지 있는데요, 비록 하찮아 보이더라도 제겐 소중한 안건들이니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1. 저는 제 아이와 증인분들에게 물었습니다. 왜 군대를 가지 않으려 하냐? 그러니까 성경에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며 칼을 든자는 칼로 망한다 했고 하나님 자신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백성을 승인한다고 하더군요. 비폭력 평화주의적 입장, 물론 이해합니다. 근데, 문제는 성경이 그렇게 말한다는 것인데...성경에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이 전쟁을 많이 했고 방어적이 아닌 선제공격도 했고 대량 학살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모순을 묻자 그건 하나님이 승인(?)한 전쟁이었다는 것입니다....음..좋습니다. 여기까지는.
기독학계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더군요. 하여간 성서를 어느 정도까지 편의적으로 해석하느냐하는 문제는 일단 논외로 하겠습니다.
 
그러면, 증인종교내에서, 병역거부를 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으로 병역참여를 결정한다면, 예를 들면, 나는 방어적 성격의 군대훈련에는 참여하겠다든지 어차피 우리가 내는 세금에도 병역예산에 쓰이는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이니 (나의 성서적 양심에서 정한) 일정한 정도의 병역에만 기여하겠다든지...등의 생각으로 병역을 받아들이겠다 라는 결정을 하면 어떻게 되냐라고 물었습니다. 
 
놀랍게도 사법처리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탈처리 또는 제명처분? ...이건 의외였습니다. 장로들이 사법위원으로 선출되고 일종의 재판을 해서 해당자를 처벌한다는 것인데...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면 처분 받으면 어찌 되느냐 했더니, 이탈 또는 제명이 되어 절교 즉 인사도 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동안 같은 신도로서 우정을 쌓은 사람들끼리 하루 아침에 인사조차 안하는 철저한 교제제한(왕따? 집단따돌림?)을 한다는 것인데요... 성서를 읽어도 각자의 양심에는 차이가 있을 터인데, 하나님을 안 섬기겠다는 것도 아니고 단지 병역거부에 대해 다른 양심적 결정을 한다고 ...사법처분이라...이건 아주 이상한 느낌이었습니다.  성서에도 판단은 하나님이 한다고 했지요? (로마서14:4)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거나 재판하지 말라는 말도 나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서를 존중한다는 종교단체에서 (성서적 해석이 분분한 사안에 대해) 양심적으로 다른 결정을 한 신도에 대해 재판이라니요. 이건 마치 중세에 있었던 천주교 파문과 같은 파쇼적 제도 아닌지요.
공공사회에 대해서는 증인들의 개인적 양심을 존중해 달라면서 정작 종교내에서는 개인의 양심을 존중하지 않고 개인적인 관계까지 깬다는... 이런 모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교단체에서 획일적인 기준을 정하고 이 기준을 어기면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처럼 잔인한 처벌을 한다는 것은 양심적 병역거부가 아닌 획일적 병역거부 또는 강제적 병역 거부가 아닐런지요.우리아이가 진정 지키고자 하는 것은 병역거부에 대한 양심적 결정이 아니라 사법처분 또는 회관에서의 눈총같은 외압적인 것이 아닐까 느낌이 들었습니다.
 
2. 사법처분의 객관적 근거는?
성서적인 얘기를 들었습니다. 성서적 근거가 있다고 하더군요. 자세히 보았더니 좀 모순된 부분이 있었습니다.
요한의 둘째편지 8절부터 11절을 근거로 하더군요.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인사도 하지 말라는 말인데...병역거부가 예수님의 가르침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 ., 그런 식이라면 증인분들이 거짓종교라고 하는 사람들 즉 (교회패가 붙어있는) 집에도 전도가지 말아야 하고 교회 다니는 사람들에게 인사도 하지 말아야 겠지요.
마태복음 7장 1절에서도 인간들끼리 재판(판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성경에는 서로 상반되는 내용인듯한 것들이 많지요. 그런데 어느 한 쪽의 성귀가 더 우선된다고 하는 것은 특정종교의 교리를 합리화하는 데 사용되는 논리로 알고 있습니다. 섣불리 그런 논리를 대입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특히나 병역거부와 같이 젊은이들의 장래와 직결되는 문제를 종교적 재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린도전서 5장 6-13절도 언급하더군요. 그것도 자세히 읽어보니 음행,탐욕,강탈,우상숭배,술취하는 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낼 것을 말하더군요. 그러니까 그 외의 죄목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병역참여를 이런 죄의 범주에 포함하는 객관적이고 성서적인 근거는 무엇입니까.
제가 듣기론 증인분들도 1차 세계대전때는 전쟁참여를 했고 일부는 집총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그때는 사법처분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그 이후에 병역거부가 교리로 정립되었다고 하는데, 증인분들은 그 전에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지 못했던 것인가요? 하나님과 예수님이 인도하는 교회라고 하면 언제나 일관성있게 바른길로 가야 하는데,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오히려 SDA나 퀘이커, 메노나이트 교단은 더 일찍이 병역거부를 해 온 역사가 있더군요. 물론 누가 먼저 했느냐 의 문제가 중요한게 아니라 일관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리하자면, 병역거부 또는 이에 따른 사법처분이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확실한 성서적 논리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지... 특히나 이를 사법처분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비인권적 사례가 아닐지....고민이 됩니다.
드릴 말씀은 더 많으나, 이상에 대해  의견 주시면 다시 부언하도록 하겠습니다.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Jongkeon Baek <[email protected]>받는사람: AMTdh <[email protected]>날짜: 2012년 4월 23일 월요일, 06시 42분 21초 +0900제목: Re: 백변호사님 문의드립니다.
 
답변을 첨부파일로 보냅니다 ^^
어떤 프로그램으로 문서를 보시는지 몰라서 hwp, doc, pdf로 같은 내용을 보냅니다.
백*건 드림
[첨부화일]
 
안녕하세요. 백*건 입니다.
 
1. 이렇게 이메일을 받아 읽어보니, 아버님께서 정말 아들을 사랑하고 있고, 한편으로는 걱정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또한 매우 따뜻하고 합리적인 분인 것 같아서, 아들이나 사모님께서 많이 의지하고 신뢰를 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2. 그리고 답변을 드리기 전에 한가지 말씀 드리고 싶은게 있습니다. 사실 저 역시 여호와의 증인의 병역거부, 여호와의 증인의 용어로 이야기 하자면 ‘그리스도인 중립’,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리스도인의 군사적 중립’ 부분에 관해서 저 역시 이 문제에 직면하고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전화로 잠깐 말씀드렸는지 모르겠지만, 저의 경우는 단지 몇주만 군사훈련을 받으면, 법무관으로 총 한번 드는 일 없이 편하게 군생활을 하거나 검찰이나 법률구조공단에서 민간인으로 대체복무를 할 수 있었던 신분이고 또한 이러한 방식으로 군을 마칠 경우 사실상 검찰이나 좋은 로펌에 취직이 거의 확정적으로 기대가 되던 신분이었습니다. 사실 좋은 직장과 명예와 좋은 보수는 누구에게나 선망의 대상이고, 제가 몇주간의 군사훈련 대신 그리스도인 군사적 중립을 지킨다면, 사법시험을 통해 어렵게 취득한 법조인의 자격정지 및 1년 6개월간의 감옥생활, 검찰 등 공무원으로 사실상 진입불가, 좋은 직장자리를 구하기 어려워지는 등 외견상 잃을 것이 정말 많아보이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제가 가진 이 믿음이 진리인지, 과연 제가 인생을 걸어도 될 것인지 시험해볼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몇달동안 제가 가진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에서 말하는 여호와하느님이라는 분께 제 인생과 인생의 목적을 맡긴 것이 잘한 선택인지 끊임없이 의심과 이성의 눈으로 시험하였었습니다.
 성서가 옳은지부터, 이 성서에 대해서 여호와의 증인이 설명하는 것이 옳은지도 의심하면서 찾아보았습니다.
 그 결과는 제 인생을 걸어볼 만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파스칼이 예전에 ‘도박이란 불확실한 것을 위해 확실한 것을 거는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저는 제가 믿는 이 믿음이 ‘확실한 것을 위해 불확실한 것을 거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인생이 불과 80,90세에 그치는 것은 법률상 개념으로도 ‘현저한 사실’로서 재판에서 별도로 입증이 필요없습니다. 남자라면 누구나 직업과 가정을 위해 10대부터 공부해서 20,30대에 기반을 잡고 가정을 꾸리며, 40,50대에 가족을 위해 희생하며, 60,70대에는 노후를 보내게 됩니다. 누구나 명예나 재산, 건강에 대한 희망과 꿈이 있지만, 과연 명예와 건강과 재산을 얻었다고 해서 그것을 언제까지나 누릴 수는 없습니다. 많은 재산이 있어도 병들고 아파서 늙어 죽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며, 인간은 누구나 잠재적 사형선고를 받은 대상으로서 죽음을 향해 달려갑니다.
 
제가 어떠한 삶을 살아갈지, 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고, 삶을 어떻게 보내야 후회없이 살 수 있을지 저는 끊임없이 고민하였습니다. 제가 만일 타협했다면, 부나 명예, 많은 성공한 친구들을 얻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평생 지울 수 없는 양심의 가책을 받았겠지요. 어떤 이는 타협했다가 회개하면 안되냐고 물어보지만 그것은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남자답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고, 지금도 후회는 없습니다.
 
3. 제가 위처럼 고민함에 있어서도 가장 중요하게 고민했던 부분이 아버님께서 질문하신 점들이었습니다.
제가 했던 고민 중에 아버님과 비슷했던 고민들은
 
(1) 성서적으로 보았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도 전쟁을 하였었고, 그리스어성경(이른바 신약)에서도 계시록 같은 곳에 전쟁이야기가 나오는데, 성서적으로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2) 과연 나의 양심은 병역을 거부할 것을 명령하는가? 아니면 단지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에 근거한 것인가?
였고, 제가 들었던 질문들 중에 아버님과 비슷한 질문은
 
(3) 여호와께서는 자유의지를 주셨고, 병역을 이행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에 관해서도 각자의 자유의지에 선택권을 주셨다. 또한 여호와의 증인 조직에서도 병역 문제는 ‘개인이 선택할 문제’라고 하였음에도 병역을 이행할 경우 조직을 떠나는 것으로 간주하는 바 과연 이런 것이 타당한 것인가?였습니다.
 
4. 위 질문 중 (1)의 경우 김두식 교수의 ‘평화의 얼굴’ (구 ‘칼을 쳐서 보습을’)이라는 책을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같습니다. 그분의 서문에서 자신은 여호와의 증인의 다른 교리에는 모두 반대하며, 정통 기독교인으로 자라왔으며, 자신의 믿음에 관한 굳건한 신념을 표방하였고, 스스로를 기독교인 법학자로 표현합니다. 검사로 재직하다 지금은 경북대 로스쿨 교수로 재직중에 있는 분인데, 기독교적 관점에 바라본 양심적 병역거부에 관하여 객관적으로 글을 써놓았습니다. 저에게 이 책이 있는데, 빌려서 읽어보시길 원하시면 만날 때 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5. 위 질문 중 (2)에 관하여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위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 법학적 지식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은 ‘양심의 자유’와 ‘종교의 자유’가 어느정도 구분되고 구별하고 있지만, 그렇게 구별된지는 사실 백년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양심에 대한 정의는 ‘어떤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함에 있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허물어지고 말 것이라는 진지한 마음의 소리’라고 정의합니다. 사실 각자가 어떤 일에 있어서 옳고 그름을 정하는 것이 양심의 기능이지만, 종교의 경우 그 본질이 옳고 그름을 정하는 것에 그 본질이 있습니다. 양심의 근원이 종교이든, 세계관이든, 사상이든 어떠한 학문이든, 그것은 본질적으로 ‘개인의 양심상 결정’으로 포괄될 수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옳고 그름을 정해주는 일은 물론 양심이 하는 일지만, 그 양심은 성서가 틀잡아 주었습니다.
 사실 양심적 병역거부에도 다양한 양심이 존재합니다. 저는 ‘성서로부터 훈련받은 양심’에 근거하여 결정하였지만, 비종교적 결정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 군대에 항거’, ‘모든 군대를 없애야 한다는 신념’ ‘일부 전쟁에만 반대한 선택적 병역거부’ 등 다양한 양심이 존재합니다.
 
 저는 성서에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네 적들까지도 사랑하라’ 는 말이 단지 좋은 말이거나 격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분명한 ‘명령’이었습니다.
 위에서 좀 장황하게 썼던 저의 믿음의 고민에 있어 전제가 된 것은 ‘성경 자체의 옳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된 점이었습니다. 성경 자체가 옳고 진리라면, 그 중에 일부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제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마 아드님도 마찬가지의 생각일 것입니다. 그 결정과정에서는 다소 다른 점이 있을지 모르지만, 아드님 역시 성서 자체에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고, 그것에 따라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나 선생님의 아드님이나, 저희 각자는 우리를 만드신 분이 주신 성서에서 옳고 그른 것을 각자의 양심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서로부터 훈련받은 양심은 저에게 “성서에서는 적들까지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근데 그럼에도 타인을 해할 수 있는 전쟁을 훈련하고 군인이 되는 것이 당신에게 가능한 일입니까?”라고 계속 되묻고 있습니다.  저나 아드님은 여호와의 증인의 교리 때문에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로부터 훈련받은 양심에서 그렇게 하라고 알려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6. 위 질문 중 (3)에 대해서 제 견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마 그 회중의 장로의 설명에 작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선, 회중 내에 장로의 회가 사법모임을 가지고, (도덕적인 부분에서 성서의 원칙을 어기는) 범죄에 관해 모임을 가지는 것은 도덕적 원칙에 있어서 범죄가 발견되었을 때입니다. 대부분 말씀하신 고린도전서 5장에 나오는 성적 부도덕이 가장 많은 문제가 되고 있지요. 사실 이러한 사법 모임은 성경적 근거가 있습니다. 마태18:15-17이나 디모데전서 5:20, 디모데후서 4:2에서는 장로들의 ‘책망하고 질책하는 것’에 관하여 나옵니다. 회중에 임명된 장로들은 회중을 깨끗이 하고, 무엇보다도 부도덕을 저지른 사람을 회개하고 돌이키기 위한 ‘사랑의’ 목적으로 그렇게 책망합니다. 그럼에도 회개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면 제명처분을 하지요. 말씀하신 고린도전서 5:5,11-13이 근거이며, 디모데전서 1:20에 그 예가 나옵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도덕원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증인임을 직접적으로 부인하며 성서의 원칙과 상충되는 결정을 한다면 어떨까요? 이를테면, 여호와의 증인이던 사람이 교회나 성당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면서 신자명부에 이름을 올릴 경우와 같은 경우말입니다.
 
 그 경우는 스스로 여호와의 증인임을 부인한 것이 되어 별도의 사법모임을 가지진 않습니다. 다만 사실관계를 확인할 목적으로 장로의 회가 모이고, 다음 집회 때 ‘--는 더이상 여호와의 증인이 아닙니다.’ 라고 광고합니다.
 요한1서 2장에서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것과 새계명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2:19에서 우리에게서 나간 무리들에 관하여 언급합니다. 이사야 2:4에서는 명백하게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도 않을 것이다”라고 하여 하느님의 백성들이 전쟁을 연습하지 않을 것이라고 알려줍니다.  아버님께서 말씀하셨던 요한2서 9-11에서는 가르침에서 벗어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알려주는 구절입니다.
 
 이처럼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서에 따라 전쟁을 배우지 않고 있으며, 누군가가 전쟁을 위한 훈련을 받을 경우 스스로 더이상 여호와의 증인이 아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게 됩니다. 따라서 별도의 책망이나 제명처분이 아닌 스스로의 ‘이탈’로 보게 됩니다.
 
 종교란 어떠한 신앙에서 있어서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묶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그 교리에 따를 것인지, 따르지 않을 것인지는 개인 스스로의 선택이며, 스스로가 그렇게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주는 것은 당연합니다만, 신자들 중 누군가가 성서와 다른 결정을 해서 스스로의 행동으로 신자가 아님을 밝힌 경우 신자가 아닌 것으로 대우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또한 그렇게 이탈한 사람의 경우,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성서의 원칙을 범한 것으로 보므로, 회개하지 않는 이상 요한2서에 나온 것처럼 대우하게 됩니다.
 
7. 또한 여호와의 증인이 예전에는 전쟁에 참여했었다는 이야기에 관하여 말씀드립니다. 사실 19세기 여호와의 증인은 병역거부에 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 생일 축하, 십자가 사용 등 지금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그때의 잘못된 견해는 분명 시정되어야 함이 분명해진 것이죠!
 잠언 4:18에서는 의로운 자들의 길은 밝은 빛과도 같으니, 점점 밝아져 마침내 날이 굳게 선다고 알려줍니다.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갈 때 햇빛이 점점 밝아짐에 따라, 지형이 모습을 드러내고 더 뚜렷해지지 않습니까?
 사실 기존의 가톨릭이나 개신교의 교리들에서 하나둘 변화하며 정련되는 것이 순리이며, 한꺼번에 모든 것에 관한 진리가 분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요한 6:68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여호와를 따라갈 뿐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호와의 증인 교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저는 ‘성서’에 근거해서 병역을 거부하였습니다. 19세기 여호와의 증인들이 어떻게 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서, 예수께서 하신 말씀, 그리고 예수 직후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병역을 거부한 기록에 근거한 지금의 판단이 제게는 중요했습니다.
 종교에서 ‘일관성’이란 당연해보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편협함과 악습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그리스어 성경(이른바 신약)에서는 히브리어 성경(이른바 구약)에서 유대인들에게 명령되었던 ‘할례’관습에 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더이상 지킬 필요가 없음을 알려주셨지 않습니까? 또한 다른 종교, 이를테면 가톨릭에서는 성서를 번역하는 것을 금지하고 평민이 소지할 경우 화형에 처했지만 지금은 그러하지 않고, 나치를 지지하고 학살에 침묵한 것에 사과한 적도 있었습니다.
 
8. 부족한 제가 아버님께 이렇게 답변을 드려도 되는 것인지, 아쉬운 부분이 좀 채워지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 많이 모자라겠지요. 저는 회중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열심 있는 정규 파이오니아(매달 70시간 이상 봉사하기로 서약한 사람들)도 아닌 평범한 청년일 뿐입니다.
 그래도 앞으로 자주 이메일이나 전화, 만남을 통해 교류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많이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
 
이동현 선생님! 행복한 일주일 되세요!!!
2012. 4. 23.  백*건 드림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AMTdh" <[email protected]>
받는사람: "백*건" <[email protected]>
날짜: 2012년 4월 25일 수요일, 10시 30분 45초 +0900
제목: 이동현입니다.
 
백*건 변호사님
 
추가로 연락드립니다.
변호사님께 받은 답장관련하여 가족들과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아이에게 병역거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성경내용들을 추가로 알려주었고,
종교내에서가르치는 것들도 중요하지만 그 외 반론들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살피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했고요, 변호사님도 인생을 걸고 종교에 대해 재검토했다는 것에 대해 많은 공감을 했습니다.
아들이 종교를 위해 인생을 걸 것 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듯 해서요,
결심하기 전에 변호사님처럼 재검토 재조사 해볼 것을 권했습니다.
다양한 자료들과 기독교문헌들도 검토해 보고 충분히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저 또한 이 기회에 좀 더 많은 조사를 할까 합니다.
이상하게도 이 전에 제가 만났던 증인분들은 다른 자료를 검토하는 것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었어요. 그게 사실 더 이상했습니다. 진리조직이라고 하던데 뭘 그리
겁을 내는지요. 비록 안티자료라 하더라도 충분히 검토하면 객관적인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감사하고요,
어제 제가 보낸 편지는 꼭 검토하시고 솔직한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백*건 변호사님
 
이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저는 성서적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살인을 저지르는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마태26:52에서 말씀하셨던 "칼을 제자리에 도로 꽂으십시오. 칼을 잡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할 것입니다."라는 말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요한18:36. 개역한글판)는 예수그리스도의 말씀과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고 말한 것을 여러분은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악한 사람에게 대항하지 마십시오. 도리어 누구든지 당신의 오른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뺨마저 돌려 대십시오’ 라는 말씀들은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완성된 그리스도인의 큰 사랑에 대해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모든 형태의 군인이 될 수 없는가에 대한 문제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이전 언급드렸던 고넬료나 세례자요한의 견해를 종합하면 이를테면 정당방위성 군대나 방어적 군대에의 참여와 군인으로서 비전투업무에 종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성서적 견해가 사람마다 조금씩 상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더 문제는, 다양한 형태의 양심으로 나타나는 개인의 결정들을 인간종교단체가 정죄하고 크리스찬 신분까지 박탈하는 것은 일종의 영적 越權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 각자가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의 기능을 사용하여 다양한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 조차 인정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이것은 누가6:37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넘어서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또한 여호와의 증인단체에서 이 문제를 해석하고 심판했던 역사를 분석하면 심각한 모순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제가 만난 증인여러분 중 단 한분도 모르는 것이었고 오히려 제가 워치타워 라이브러리를 통해 알려주었습니다. 아주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라이브러리에는 이런 역사가 (제가 볼때는 약간의) 합리화하는 방법으로 쓰여졌지만 이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먼저 로마서 13장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위"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군복무를 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는 이 성구에 대한 이해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러하냐구요? 잠시 배경을 설명드리겠습니다.
증인분들은 다소 생경한 단어 즉 중립이라는 말을 자주 쓰시더군요. 이 단어를 분석해 보면서 알게 된 내용들입니다. 
 
"중립"이라는 개념이 협회에 의해서 증인들에게 분명하게 설명된 때는 언제일까요?
 
파수대 1995년5월15일호 "크고 작은 빛의 번쩍임"이라는 기사 제2부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23면)
 
그리스도인 행실과 관련해서도 빛의 번쩍임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중립 문제를 고려해 봅시다. 「파수대」(영문) 1939년 11월 1일 호에 실린 “중립” 기사에서 이 문제에 특별히 밝게 빛이 번쩍였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직후에 나온 그 기사는 참으로 시기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그 기사는 중립이 무엇인지를 정의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이 정치 문제나 나라들 사이의 대결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설명하였습니다. (미가 4:3, 5; 요한 17:14, 16) 이것은 그들이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한 가지 요인입니다. (마태 24:9) 고대 이스라엘이 벌인 전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선례가 아닙니다. 예수께서 마태 26:52에서 분명히 말씀하신 바와 같습니다. 
더욱이 오늘날, 고대 이스라엘의 경우처럼 하느님의 통치를 받는 신권 국가는 한 나라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을까요?
 
[선포자]책 제 14장 191,192면에서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그들의 입장이 언제나 엄정 중립은 아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다른 사람들이 믿던 것과 같은 신앙, 즉 “더 높은 권세들”(「제임스 왕역」)이 “하나님의 정하신바”라는 신앙의 영향을 받아 행하였다. (로마 13:1) 따라서 미국 대통령의 포고와 일치하게, 「파수대」는 성경 연구생들이 1918년 5월 30일을 세계 대전의 결과와 관련된 기도와 간구의 날로 삼아 지내는 일에 동참하도록 권하였다.
여러 해에 걸친 전쟁 기간에, 성경 연구생들이 처한 상황은 다양하였다. 그들이 그러한 상황에 대처한 방식도 다양하였다. 일부 사람은 세속 통치자를 가리키는 “모든 권세”에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총을 들고 전선의 참호로 갔다. 그러나 그들은 “살인하지 말찌니라”는 성구를 염두에 두고 공포를 쏘거나 단지 적의 손에 있는 무기를 맞추어 떨어뜨리기만 하려고 하였다. (출애굽 20:13) 
 
그래서 1차 세계대전 당시 증인들 중 일부는 전선으로 갔습니다. 또한 일부는 양심적병역거부로 처벌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예상할 수 있듯이 군대에 입대한 이후의 행동들도 아마 다양했을 것입니다. 심지어 당시에 협회는 기도회를 열 것까지 지시하였는데, 그것은 당시 1918년 6월15일호 파수대에 다음과 같은 광고내용으로 알 수 있습니다.
 
"4월 2일 의회 결의안 및 5월 11일의 미합중국 대통령의 선언에 따라 모든 곳에 있는 주의 백성은 5월 30일을 기도와 간구의 날로 정할 것을 제안하는 바이다."
 
게다가 그 뒤의 파수대 기사들은 미합중국을 찬양하는 기사가 실렸다는 점을 1976년 연감 106면에서는 시인합니다. 협회가 이 정도였다면, 당연히 일반 증인들의 입장이야 어떠했으리라는 짐작을 충분히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전쟁에 참여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거부하였고,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전쟁공채를 사지 않았다는 이유로 박해받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비전투복무분야는 받아들였다는 것이죠.
그러다가 1929년이 되자, 갑자기 '성경연구생'들은 로마서13장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위"가 세상 정부권위가 아니라 여호와 하느님과 예수그리스도를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생각으로 변경을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그 해 파수대 6월1일호와 6월15일호에서 그렇게 설명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이전 러셀회장시대에는 분명히 위에 있는 권위는 세상 권위를 말한다고 설명하였고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러더포드 회장 시절에 이렇게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세금문제 정도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라, 당연히 군복무 문제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파수대 1996년 5월1일호 "하느님과 카이사르"라는 기사 제목의 14면에는 ""위에 있는 권위"에 대한 점진적인 이해"라는 소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일찍이 1886년에, 찰스 테이즈 러셀은 「시대에 관한 경륜」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예수나 사도들은 모두 지상 통치자들의 일에 조금도 간섭하지 않았다. ··· 그들은 교회에게 법에 순종하라고 그리고 권위 있는 자들의 직위 때문에 그들을 존경하라고 ··· 그들이 정한 세금을 내라고 그리고 국가의 법이 하느님의 법과 상충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사도 4:19; 5:29) 어떤 확립된 법에도 저항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로마 13:1-7; 마태 22:21) 예수와 사도들과 초기 교회는 모두 법을 준수하였는데, 자기들이 이 세상의 정부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었고 또 정부들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하였다.”
 
이 책은 사도 바울이 언급한 “더 높은 권세들” 즉 “위에 있는 권위”가 바로 인간 정부 권위임을 정확히 밝혔습니다. (로마 13:1, 「제임스 왕역」) 1904년에 「새로운 창조물」(The New Creation)이라는 서적은, 참 그리스도인들은 “현시대에―선동하고 다투기 좋아하고 흠잡는 사람들이 아니라―법을 가장 잘 준수하는 사람들 가운데 속해야 한다”고 언명하였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이 말이 정부 권세에 철저히 복종하는 것을, 심지어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군 복무를 받아들일 정도로까지 복종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군 복무를 예수의 이러한 언명에 어긋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칼을 잡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할 것입니다.” (마태 26:52) 분명히, 위에 있는 권위에 그리스도인이 복종하는 것에 대한 좀더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였습니다.
 
여기서 좀 더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였다고 하면서 1929년부터의 상황을 설명합니다. 그 명확한 이해란 바로 더 높은 권세들이 하나님과 예수님이었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929년에, 여러 정부들의 법이 하느님께서 명하시는 것들을 금하거나 하느님의 법이 금하는 것들을 요구하기 시작하였을 때, 더 높은 권세들이 여호와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2차 세계 대전 전과 그 기간 중의 어려운 시기에 그리고 공포의 균형을 이루며 전투 준비 태세를 갖춘 상태에서의 냉전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의 종들이 가지고 있던 이해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여호와와 그분의 그리스도의 주권을 드높이는, 사물에 대한 이러한 견해가 하느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 어려운 시기 중 내내 타협할 줄 모르는 중립 입장을 유지하도록 도움을 준 것이 분명합니다.
(중요~~~~)
 
그런데,....세월이 흘러 협회는 이 성구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위"에 대한 명확한 이해를 또 다른 명확인 이해 즉 이전의 견해대로 세상 정부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상 점진적인 이해가 아니라 과거의 이해로 다시 돌아가는 변경이었습니다.
그 변경된 지침은 파수대 1962년11월15일호(영문)에서 나오게 되었으며, 그 설명에서는 사실상 "위에 있는 권위"가 인간들의 지상정부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새로운(아니 이전 러셀시대로 돌아가는)주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질문이 생깁니다. 협회가 다시 로마13장에 대한 나름 올바른 견해로 돌아갔다면, 어째서 그 성구의 잘못된 이해 때문에 영향을 받았던 "중립"교리가 유연하게 변경되지 않는 것일까요?
그 이전처럼 그것을 그리스도인 각자의 양심문제로 허용하면 안 되는 것일까요?
여호와의 증인의 현대 역사에서 "중립"이라는 획일화된 원칙이 확립된 것은, 분명히 로마서13장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위"에 대한 잘못된 지침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은 위 파수대 기사에서도 일부 시인한 것과 같습니다.
 
저의 조사로는 이것은 당시 법조계 출신의 러더퍼드의 극단적인 견해 즉 모든 세상 정부는 사탄의 도구라는 식의 흑백논리로서만 바라본 견해에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물론 "온 세상은 악한 자안에 처해 있다"는 요한1서4:19(개역한글)의 말씀도 있지만, 로마서13:4은 그들 정부들을 "하느님의 봉사자"(혹은 "하나님의 사자")라고도 표현함으로서 하느님께서 세상 정부들을 한시적으로 허용하셨고, 그들을 때때로 공의가 시행되도록 힘을 허락하셨음도 출판물에서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로마13장에 나오는 "위에 있는 권위에 복종하십시오."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세상 정부에게 하도록 요구하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그들은 하느님에 비해서 상대적인 지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며, 그러므로 그들에 대한 복종 역시 절대적 복종이 아닌 상대적 복종이어야 한다는데 동의합니다.
그러나 성서에는 절대적인 세부지침이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각자가 어느 정도까지 순종해야 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각자가 선택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특정종교단체가 규제할 수 있다는 것은 증인분들이 경멸하는 바리새인들의 (인간의 양심과 세부행동을 인간이 규제해야 한다는)논리입니다.
(인간조직이 다 그렇듯이) 특정 지침을 정하고 시대에 따라 (교리의 발전이 아니라)변동되고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자찬하는 종교다운 행동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대체복무제도 1996년 5월1일호 파수대가 나오기 전까지는 전면 금지였다고 하는 군요. (받아들인 증인들은 제명 혹은 이탈처리되었습니다. 조사해보십시오)
 
로마13장에 대한 다른 이해를 다시 협회가 하게 되었을 때, 성서해석은 이전으로 돌아갔지만, 그 해석으로 인한 행동지침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이제는 대체복무제 허용을 위해서 오히려 협회에서 언론에 호소하기까지 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불필요한 희생을 강요해온 탓일까요? 증인단체는 그들의 눈치를 보면서 어서 빨리 그들 세대가 사라지기를 바라는 것일까요?
중립이라는 원칙의 근원이 되었던 로마13장의 해석이 변하였다면, 이전처럼 행동양식에 있어서도 양심문제로 돌아가는 것이 순리이지만, 오랜 기간동안 출판물해석을 성경처럼 따랐던 무리들에게는 행동양식이 바뀌면 혼란과 불만이 예상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종교단체의 자의적이고 광의적인 성경해석이 엄청난 개인희생을 가져온 것은 아닐지 우려됩니다.
그리고, 출판물에서는 ‘이해’라는 말을 자꾸 쓰는데 사실상 이것은 이해가 아니라 지침이나 명령정도가 됩니다. 왜냐하면 출판물에서 새로운 이해라고 표현해도 증인분들은 실상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아들여 목숨을 걸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뀔수도 있는)이해를 통해 만들어진 행동양식에 대해 종교가 재판하는 것은 더 더욱 문제입니다.
 
이해는 이해로 그쳐 다르게 바뀔 수도 있다는 유연한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어차피 (그동안 그랬듯이) 세월이 지나면 또 바뀌는 것이고 이번 중립문제처럼 과거의 이해로 돌아가는 (다소 어이없는) 일도 생기기 때문입니다.
다음 성구가 무엇을 의미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악한 자에게는 그 마음 속에 범법의 말이 있고 그 눈앞에는 하느님에 대한 무서움이 없다.  
자기 눈으로 보기에 자신에게 너무 매끄럽게 행하였기에 그는 자기 잘못을 깨달아 그것을 미워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 입의 말은 유해한 것과 속임수이니,  그가 더는 선을 행하는 데 통찰력이 없구나.
(시36:1-3. 신세계역)
 
이동현 올림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Jongkeon Baek <[email protected]>받는사람: AMTKOREA <[email protected]>날짜: 2012년 6월 10일 일요일, 13시 08분 04초 +0900제목: Re: 백변호사님께 질문드립니다. - 이동현
 
이동현 선생님께.
 
긴 이메일을 쓰신다고 수고하셨고, 또한 감사드립니다. 분명히 이러한 토론은 편견없이 주제에 관하여 의견을 나누고, 또한 지식을 알게되는 기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답변을 드리기 전에 저 역시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우선 저는 질문을 드린 적이 없는 것 같아서요 ^^
두가지만 질문드리고, 우리 서로 대답을 준비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보입니다. 우선, 성서에 대해 깊은 존중심과 이해를 보이시는 선생님의 종교심에 많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성서의 많은 구절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이를테면, 마태복음 26장 52절이나. 이사야 2장 4절이나 누가복음 6: 27,28절이 과연 그리스도인의 전쟁참여에 관하여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대부분의 범죄 특히 양차세계대전, 심지어 정당한 전쟁 이론이 노골적으로 이용된 십자군 전쟁 등의 기록을 보면 하느님께서 과연 전쟁 참여를 승인하신다고 보시는지, 저는 요한 2서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위의 마태복음 26장 52절이나. 이사야 2장 4절이나 누가복음 6: 27,28절이 포함되는 것 같습니다만... 그에 대한 의견이 궁금합니다.
 
 
또한 한국 군대가 그리스도인이 입영하여도 문제가 없는 방어적 군대라고 하시는데, 베트남 전쟁이나 이라크 참전이나 아프가니스탄 참전한 것을 보거나 또는 군대 내에서 벌어지는 군대문화들, 성추행이나 폭행, 고문, 군사주의, 국가주의 문화 등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한국에 오셨고, 입영영장을 받았다면 기꺼이 군대에 복무하셨을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고넬료 이야기를 생각해보다가 라합의 생각(여호수아 2장)이 났습니다.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매춘부였던 라합도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의롭다는 선언을 받았습니다(야보고 2:25). 그렇다면 라합이 하느님의 백성이 된 후의 기록은 성서에 나오지 않고, 매춘부를 그만두었다는 기록이 전혀없으므로, 하느님이 매춘부를 용인하시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고넬료의 경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건설적인 토의가 계속 진행되어 몹시 기쁩니다.
답변기다리면서 저 역시 답변을 준비해보겠습니다 ^^
 
 2012. 6. 10.  백*건 드림
 
--------- 원본 메일 ---------
보낸사람: "AMTdh" <[email protected]>
받는사람: "Jongkeon Baek" <[email protected]>
날짜: 2012년 6월 11일 월요일, 10시 23분 25초 +0900
제목: RE: Re: 백변호사님께 질문드립니다. - 이동현
 
네 질문 감사합니다.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변드리겠습니다. 우선 각론적으로 언급하신 구절들에 대해 하나하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1-1. 마태 26:51-56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더라 
그 때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강도를 잡는 것 같이 칼과 몽치를 가지고 나를 잡으러 나왔느냐 내가 날마다 성전에 앉아 가르쳤으되 너희가 나를 잡지 아니하였도다 
그러나 이렇게 된 것은 다 선지자들의 글을 이루려 함이니라 하시더라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계시록에 보면 흰말 탄 그리스도가 많은 나라를 칼로 처부수는 것이 묘사됩니다. 그러면 이 그리스도도 칼을 가졌으니 칼로 망할까요? 성서의  하나하나의 구절을 절대적이고 문자적으로 적용하면 이런 모순에 봉착합니다. 
이 성구는 아시다시피 선지자들의 글 즉 그리스도가 잡혀 죽어야만 인류가 구원된다는 당위성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는 것이죠.
 
그리스도를 무력으로 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성서원칙을 거스르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확대적용을 하려면 한도 끝도 없지요. 성서전체를 봐야지 특정성구만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입니다.
 
1-2. 누가복음 6: 27,28절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이 성구에는 다음과 같은 반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 원수를 사랑하라는 원칙이 방어적 군대조차 근무하지 말라는 말이라면 구약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원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서의 어느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따라서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원칙은 , 침략적 군대가 아니라 방어적 군대에는 복무할 수 있다는 다른 양심(애매한 원칙에 대해 다른 사상을 가진 사람들조차)도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1-3. 이사야 2: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이상적으로 세상에 모든 군대가 사라지고 서로 싸우지 않는 상태가 가장 좋은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부득불 그럴 경우가 아니라면 어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생깁니다. 또한 군인의 신분에 대해서도 관대해진 신약의 표현들은 어찌 해석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도 생깁니다.  다시는 전쟁을 연습치 않아도 되는 세상이 지금 도래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런 세상을 만들었다면 모를까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라는 질문이 생깁니다. 예언적이고 선언적인 성구를 한 종교단체의 절대적 교리로 만들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이 인간의 전쟁을 용인하거나 그리스도인이 전쟁참여를 해도 된다고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연히 크리스찬이라면 전쟁을 반대하고 비폭력주의로 가야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방어적 군대에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는 한도내에서 군대복무를 하면서도 크리스찬이기를 원하는 사람에 대해 일개 종교조직이 그 신분을 박탈해도 되느냐라는 문제, 이것은 매우 미묘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왜냐하면 성서에는 고넬료나 이스라엘 군대와 같이 군대를 복무하면서 하나님을 섬긴 예도 있기에) 같은 성경을 읽어도 다른 양심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의 믿음과 성서적 판단조차 종교조직이 가름하고 정죄하는 것,,,..이것이 여호와의 증인의 커다란 문제입니다.
 
2.
라합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매춘행위는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를 어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계속 하나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매춘(간음)을 중단해야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군대문제,...성서에는 어떤 군인도 되지 말라는 명시적 원칙이 없습니다. 만약 간음하지 말라는 원칙과 같은 명시적 규정이 있다면 종교조직이 개인을 단죄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명시적 규정이 있습니까?
 
변호사님 아시죠? 법원(法源)이 없으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것, .  추론이나 확대해석 정도로 하나님과 개인의 관계까지 끊어서는 안된다는 것, 아실 것입니다.
 
총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저에게 여러번 그리스도라면 어떤 판단을 하실 것인가라는 질문을 하시고 계십니다. 네,,맞습니다. 예수님이라면 한국군대에 입영해서 훈련을 받거나 하는 것을 거부하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이죠...생각해보세요. 논리적 모순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라면...이라는 전제 말이죠. 
그러면, 여호와의 증인분들은 그리스도처럼 모두 결혼도 안하고 무직상태로 전도활동만 하십니까. ...? 아니죠? 
 
그런 논리처럼 , 제가 역질문을 드리죠.  
 
그리스도라면, 하나의 종교단체가 병역에 관한 다른 결정을 한 젊은이의 크리스찬 신분을 박탈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증인종교가 그리스도처럼 행동하는 것을 이유로 든다면 완벽하게 모두 그리스도처럼 행동해야죠. 그러나 그럴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처럼 행동하고자 하는 취지는 알겠지만, 다 그럴수는 없다는 사실, 또, 그렇다 아니다를 종교단체가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사실, 인간이 인간을 재판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런 성서의 원칙에도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변호사님이 여호와의 증인종교의 [병역거부불허]방침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알려주신 것은 잘 이해합니다. 문제는 이것들이 어떤 절대적 원칙이 되려면 배치되는 성구도 없어야 하며 (십계명이나 산상수훈처럼)명시적 성경표현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아시다시피 그렇지 못합니다. 성서에는 (제가 이전 메일에 적어놓은대로) 이 문제에 대해 개인의 판단과 자유를 허용하는 많은 성구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누가22:36 / 누가3:14 / 사도10,11장) 따라서 성서전체가 전하는 종합적 사상은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일개의 종교단체가 이 문제에 대해 하나님마냥 누군가를 획일적으로 재판할 것이 아니라 신도들에게 병역 문제에 대한 관련성경구절들을 모두 알려주고 개인양심에 따른 합리적 결정을 내리도록 한 후 그 결정에 대해 존중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분명히 크리스찬이라면 비폭력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비폭력주의를 실천하는 구체적인 사안들 예를 들면 평화상태의 방어적 군대에도 참여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개인의 양심의 결정사항이며 성서의 명시적 규정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한국군대가 역사적으로 폭압적이나 비민주적인 일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식으로 따지자면 우리는 한국국민신분자체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는 5공화국 같은 독재시절에 한국정부가 불법적인 일을 하는 것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우리는 세금을 내었고 나라의 법을 지켰습니다. 증인분들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내가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앞에 내가 어떤 신분인가, 어떤 개인적 행로를 걷고 있는가 하는 것 아닐까요. 비록 내가 한국군대에 입영한다 해도 침략행위나 비민주적인 일에는 가담하지 않겠다..라는 결심을 한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실까요. 종교단체가 절대적 심판권이 있는 것 마냥 그런 개인적 양심을  정죄할 수 있을까요.
 
여호와의 증인 종교가 아름다운 교회가 되려면, 스스로 사회에 대해 요구하듯이 (성서적 논란이 있는 문제에 대해) 개인양심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종교내에서 병역을 거부하는 이들이 나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양심적 병역거부일 것입니다.
 
저의 주요논제는
 
1.  왜 종교단체가 사회적으론 양심의 자유를 존중해 달라고 하면서 내부적으로는 양심의 자유를 강제하는가 
( 내외면의 모순문제 )
 
2.  모든 형태의 군인이 크리스찬이 될 수 없는가
 
3.  그리스도인의 신분을 하나님이 아닌 종교단체가 판단할 수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살펴주십시오.
 
아울러, 좀 더 드리고 싶은 말씀은, 워치타워라이브러리를 통해 증인들의 병역거부 역사에 대해 정리를 해 놓았습니다.이상하고 의심스러운 점은, 이 원칙에 있어 증인지도부는 (다소 이해되지 않을)수정과 번복을 거듭하였습니다. 병역거부로 인해 희생된 많은 이들의 생명과 젊음을 생각한다면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여타 컬트종교가 초창기 대부분 겪고 있는 교리변경이 증인종교에서도 일어났고 변경될 때마다 처벌은 달라졌다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인간종교가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 원칙이 가변적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원칙은 변하지 않을 터....참으로 문제입니다.
 
변호사님이 이번 답변을 정리하는 동안, 저도 이 역사에 대해 정리해서 모순점을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동현
 
 
 +++++++++++++++++++++++++++++++++++++++++
이후로 백*건 변호사의 답변 메일은 오지 않았습니다. 
사실상, 토론을 중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Back to Top